2019.11.12.불날. 맑음

조회 수 434 추천 수 0 2019.12.31 23:45:40


 

무청을 데쳤다.

양이 많을 땐 이듬해 6월 행사까지 먹는 무시래기다.

올해는 5월에 이르긴 하려나.

 

아침은 빨리 왔으나 더뎠고, 꽉 찼으나 또한 비었다.

11월의 긴 밤이나 아침빛이야 어김없이 아침 시간에 왔고,

아침이면 수행이며 짐승 먹이는 일이며 늘어선 일들 사이를 다니는 건

마치 더딘 발걸음 같은 호흡이었다.

그렇게 움직인다고 움직이니 꽉 채워진 시간이나

또한 별 한 일도 없더라는 면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아침이었다.

느리다고 하지만 어느새 정오였고 금세 해가 뚝 떨어졌다.

멧골이다.

 

진돗개 3개월짜리 제습이와 가습이가 싸웠다.

줄을 쥔 자의 잘못이다.

오늘은 가습이를 줄에 묶어 다니고

제습이는 풀어서 산책을 하리라 하고는

제습이 줄부터 풀었는데 가습이한테 달겨들었다.

피가 나올 때까지 목을 물고,

가습이도 지지 않고 제습의 다리를 물어 비트는데,

내 발도 둘을 떼어놓으려 버둥을 치고 내 손도 요리저리 어찌 해보지만

, 어느새 털썩 주저 않겠는 거다.

말릴 수가 없는 거다. 속수무책인 거다.

그렇다고 오래 손을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어찌 어찌 떼어내고 둘 다 양손 산책 줄에 묶어 걷는다.

언제 싸웠더냐, 서로 아는 사이더냐싶게

무심히 또 걷는 둘이라, 아니 셋이라.

 

제습이는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아침뜨락에서 킁킁거리며 풀을 매며 나왔던 뿌리들을 씹는데,

생각해보니 유채 씨를 뿌렸던 자리였을세.

돌아와 사료를 더 주었네.

달골의 두 마리 개들은 사료로만 키우기로 했다.

사냥을 하게 할 게 아니라면

그게 더 산 속에서 깔끔하게 키우는 개에 걸맞다는 생각이.

사람 먹는 걸 안 먹이겠다는.

그들을 멧돼지와 맞설 수 있게 할 참이다.

 

은식샘이 하룻밤 묵다.

곡주에서부터 학교 냉장고를 채워주었고,

이 멧골에서 겨울 나는데 수월하라고 열선 조끼도 챙겨주고,

바깥등이며 손전등이며 산골살림에 요긴한 것들을 풀어주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6476 2014. 7. 6.해날. 낮은 하늘 / 이니스프리로 옥영경 2014-07-16 1910
6475 6월 28일, 그럼 쉬고 옥영경 2004-07-04 1910
6474 2011. 1.22-23.흙-해날. 맑음, 그 끝 눈 / ‘발해 1300호’ 13주기 추모제 옥영경 2011-02-02 1907
6473 2008. 5.4-5. 해-달날. 비 간 뒤 맑음 / 서초 FC MB 봄나들이 옥영경 2008-05-16 1905
6472 2005.10.29.흙날.맑음 / 커다란 벽난로가 오고 있지요 옥영경 2005-11-01 1905
6471 5월 25일 불날, 복분자 옥영경 2004-05-26 1903
6470 2007.11.10.흙날. 썩 맑지는 않지만 / 지서한훤(只敍寒暄) 옥영경 2007-11-19 1902
6469 <대해리의 봄날> 여는 날, 2008. 5.11.해날. 맑으나 기온 낮고 바람 심함 옥영경 2008-05-23 1900
6468 12월 13일 달날 맑음 옥영경 2004-12-17 1900
6467 일본에서 온 유선샘, 2월 23-28일 옥영경 2004-02-24 1900
6466 39 계자 아흐레째 2월 3일 옥영경 2004-02-04 1898
6465 39 계자 나흘째 1월 29일 옥영경 2004-01-31 1895
6464 2005. 10.23.해날.맑음 / 퓨전음악 옥영경 2005-10-24 1894
6463 125 계자 이튿날, 2008. 7.28.달날. 빗방울 아주 잠깐 지나다 옥영경 2008-08-03 1889
6462 39 계자 엿새째 1월 31일 옥영경 2004-02-01 1889
6461 2008. 3.14.쇠날. 갬 / 백두대간 6구간 가운데 '빼재~삼봉산' file 옥영경 2008-03-30 1887
6460 12월 14일 불날 맑음 옥영경 2004-12-17 1886
6459 불쑥 찾아온 두 가정 2월 19일 옥영경 2004-02-20 1881
6458 6월 7일, 성학이의 늦은 생일잔치 옥영경 2004-06-11 1879
6457 12월 12일 해날 찬 바람, 뿌연 하늘 옥영경 2004-12-17 1878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