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하늘 한켠 먹구름 좀 있어 더위도 나으련가 했지만

웬걸, 바깥이 아니어도 집안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처 식구가 들고 온 옷가지 하나 수선을 해주고,

풋호박과 고구마줄기가 찬거리로 좋은 때,

우리 밭의 호박도 있지만 이웃 할머니가 들여 준 호박도 좋으네,

데치고 무치고 볶고 굽고 졸이고.

밝을 때 달골 한 바퀴 둘러보겠다고 올라간 걸음에

찬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내려오다.


예를 들면 어떤 거요?”

진즉부터 혹시 엄마나 집안 어른에게 뭔가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기거든 내게 연락 달라 했고,

오늘 다시 통화한 김에 그리 말했더니

그 아이가 내게 물었다.

3 수험생 하나, 물꼬에서 만난 적 없으나 연이 닿았고

조모와 장애아 동생이랑 함께 사는 친구라 이번 학기 내내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 나도 잘 모르겠지만 예를 들면 정말 한 달이라도 특별과외가 필요하다거나...”

수시지원이라서 1학기에 상황이 다 끝났고, 이제 자소서만 쓰면 된다고 했다.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니체는 말했다, 남을 연민할 때는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고.

가여이 여길 때는 기예가 필요하다 했는데 나는 어떠했던가...

내 출발은 무엇이었나. 나는 숱한 돌봄으로 살아왔다. 내 삶이 그렇게 지탱되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누군가의 삶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받았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할 만하면 마땅히 할 만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므로.

그렇게 사람의 마음으로 살고자 했다.

물꼬에서 사는 삶도 그것이 밑절미가 된.

별 볼 일 없는 내 삶에도 비춰진 볕은 내게 닿았던 온정들 덕이었던.

그리고 그 온정은 나를 구차하게 만들지 않았다.

내 돌봄의 의지가 내가 살피고자 하는 상대를 남루하게 만들지 않도록 찬찬히 살피기!

 

1학기 제도학교 지원수업은 이제 단 하루를 남겨놓고 있다.

연가를 쓰고 있지만 소통메신저를 켜놓은 채

마지막 업무들을 처리할 것이다.

무엇보다 어쩌면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학급 6학년 아이의  중학 진학 선배치 결과 관련 굉장한 저항이 필요할 상황.

그리고 91일자로 들러 사택이며 두어 가지 인계가 필요한 공간을 정리할 때

특수샘과 분교 후임자, 그리고 내가 머리도 맞대야 하리.

그날부터는 나는 담임교사가 아니라 아이 보호자 조모의 대리인으로 말이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

 

(...)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뜬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어쩌면 교육청과 다툴 일을 앞두고 있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문득 김수영이 1960년에 쓴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읽었다.

혁명은 안 되고 겨우 방만 바꾸었지만 어째도 나는 풍성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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