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26.달날. 맑음

조회 수 313 추천 수 0 2021.08.09 03:44:45


 

일어서야 하는데...

한 번 일어서기가 범보다 무섭다,

할머니는 곧잘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 소리를 내는 힘으로 일어서서

수건을 집어 올리는데 스르륵 손을 빠져나간다.

다시 잡아 어깨에 걸치고,

주섬주섬 삼태기에 호미며 담아 아침뜨락을 나온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야말로 I'm cooked.(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기진맥진하다)

 

06시 햇발동과 창고동 모든 창들을 활짝 열어두고,

아침뜨락에 들어서서 달못 아래까지 곧장 걸어갔다,

로 시작할 줄 알았다.

가는 걸음에 옴자에 키 큰 풀 몇 개 뽑고,

샤스타데이지 한 뿌리 삐져나와 있는 게 오래 전부터 보였는데,

그걸 샤스타데이지 무리가 채우고 있는 옴자 3자 모양 안 빈 한 곳으로 옮겨야지,

딱 오늘이 그걸 할 순간이었다, 손에 호미가 들려있는.

여기서 패 내고 저기서 구덩이를 파고 물을 흠뻑 주고 심고 다시 물을 주고.

비로소 달못 아래 돌무더기 앞에 이르다.

엊그제부터 하던 돌쌓기를 이어간다.

기존에 던져두었던 무더기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하지만 보다 정돈된 형태로.

돌탑이니까.

얼추 오늘 분량은 했다 할 때 달못 오르는 경사지 풀들이 또 보이지.

특히 아주 큰 저것들!

꽃이 많지 않았을 적 풀을 매며 그들을 꽃 대신 거기 남겨두었다.

너무 자란 지금, 이제 꽃이 아니다.

그때는 꽃이었으나 지금은 풀. 필요에 따라.

아름답기보다 거슬리니까.

남기면 꽃이고 뽑으면 풀이라.

(사람 관계도 그렇겠구나.

한 때 내가 그에게 꽃인 날도 있었으리,

그러나 세월 가고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풀이 되었을 수도.)

그 정도 키를 받치고 있으려면 그 만큼 또 뿌리가 단단해얄 테지.

여간 힘이 들지 않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여러 차례 찧을 뻔.

큰 키를 뽑고 나면 다음 키가 또 큰 키로 보인다. 그것들까지 뽑고.

나뭇단도 아닌데 한아름 안으니 몸이 휘청할 정도의 무게.

저 멀리 밭가 풀섶으로 던진다.

 

휘청휘청 집안으로 들어오다.

, 젊은 친구들이 같이 일하며 자주 늘어져있고는 했는데,

사람마다 일품도 다르고 힘도 다른 걸,

더구나 해보지 않았던 일일 것을, 그래서 더 어려웠을 것을,

진을 다 빼고 앉았을 수도 있었던 그때,

왜 저리 마음을 더 못 내고 밍기적거리는가 야속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이런 순간일 수 있겠구나,

힘이 다 빠졌을 수 있겠구나!

내게 풀을 매는 일은 그렇게 순간순간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는.

 

더운 기운데 찬물에 쓱쓱 몸을 씻는다.

나오려다, 그래도 씻으러 들어간 김에, 젖은 몸으로 빨래도 수월하지.

변기 앞 깔개를 물에 담가 놓았더랬다.

세제를 풀어 솔질을 한다.

볕이 좋을 때 얼른 널어야지.

그제야 간단하게 아침 요기를 했다.

 

10시가 다 돼서야 아침 해건지기; 아침수행

그찮아도 유연하지 못한 몸인데 부쩍 뻑뻑하다.

왼쪽 어깨 바로 아래가 특히 불편한 걸.

청소하고 쉬고 낮밥 먹고 책 좀 보고.

 

해 기운이 한참 꺾였다 싶은 낮 5,

기숙사 창들을 닫고 햇발동 앞 화분들 물을 주고 다시 아침뜨락에 들었다.

학교아저씨한테는 숨꼬방(새 목공실) 청소를 부탁드리고.

물 호스가 닿는 데까지 물을 주고; 자작이며 꽃그늘길의 장미와 포도와 능소화와...

달못 둘레 풀을 뽑으려던 길인데,

백리향 둥근 자리가 먼저 눈에 든다.

둥글게 호미로 파놓았지만 비가 오면 금세 흐트러지는 경계,

백리향이 말 잘 듣는 아이 마냥 얌전히 동그랗게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거기 검은 주름관을 돌려야겠다 싶었네.

옴자들에 검은 플라스틱 호스로 경계를 삼겠다는 마음이야 먹었지만

아직 시도도 못해보고 있었는데,

굵지는 않으나 공사에서 쓰고 남은 주름관이 마침 창고가 있는 거라.

가져다가 튤립 둥근 구간과 함께 두 개의 원을 만들었는데

어라! 가벼우니 자꾸 흩친단 말이지.

가벼워서 위로 들리는, 형태를 얌전히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 그렇지, 관에다 흙을(모래는 없고) 채웠네.

자리잡아주고 나니 백리향 사이 토끼풀이며 여러 풀들이 삐죽이는 게,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는 거라. 일삼았다.

어둠에 밀려서야 아침뜨락을 나오다.

다시 물 아래 섰다, 흙투성이 양말과 흠뻑 땀에 전 속옷을 빨며.

씻고 나오니 밤 9시였다.

 

달이 좋은 밤!

 

 

* 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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