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소나기 내린다던 날, 산 너머에서 번개만 저녁내 번쩍였다.

정말 이렇게 지지받아도 되나 싶을 만치 일정마다 날씨의 기적과 함께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궂은 날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행사마다 대체로 순조로운 날씨가 힘을 실어준다.

생이 다 고마워지는.

 

달골에서부터 뒷정리를 하고 학교를 내려가 부엌으로 달려가는데,

오늘은 흐름을 좀 달리하다.

이른 아침 학교부터.

사람들을 맞는 꽃부터 찾아 가마솥방에 들이고

뜨거운 물로 수저와 컵과 그릇 소독,

그리고 싱크대 네 칸 부시고 소독제로 닦고 다시 뜨거운 물을 끼얹고.

행주도 삶고.

간단하게 식재료 몇 다듬어놓고 다시 달골.

기숙사 방의 이불들을 정리했다.

 

청소년 넷, 그리고 어른 넷이었다.

일찌감치 마감을 했다. 예정했던 것보다 신청이 많아서가 아니라

코로나 확산세에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시점에

지방 또한 강도 높은 단계여 우리 역시 진행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컸기에.

특별한 안전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각자 조심하고 올 거라는 믿음 정도 전부인.

 

안내모임 뒤 물꼬 한바퀴’.

결국 물꼬의 가치관을 나누는 시간인.

우리는 이런 의지를 가지고 이리 살아보려고 한다 그런.

모든 면에서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적지 않은 부분에서 생태적 민감성을 키우며 살려는.

쓰고 있는 물건을 더 오래 쓰려는.

낡은 많은 물건들, 그 물건이 지닌 소멸성을 연장하기.

준한샘이 들어와 달골 이르는 길가 늘어진 풀들을 예취기로 깎고 있었다.

 

낮 밥상엔 비빔국수도 잔치국수도.

윤호샘이 부엌을 거들었다. 삶은 달걀도 까고.

초등 2년에 처음 왔던 아이가 자라 스무 살 품앗이가 되었다.

물꼬에 머물지 않았던 방학이 없었고,

학기 중에도 더러 그를 보았다.

혹시 국수 안 먹는 분 계십니까?”

사람이 몇 되지 않으니 식단이야 얼마든지 바로 바꾸기도 쉬운.

누군가 안 먹거나 못 먹는다면 다른 걸 준비하면 되지.

그런데 건호가 넌지시 다가왔다.

옥샘, 아까 국수 안 먹는 사람 있냐고...”

? 안 먹어?”

아니, 아니요. 너무 많이 먹어서...”

여전히 유쾌한 건호다.

예쁘게 자란 한 아이의 좋은 사례를 보여주는 친구.

 

양푼이 팥빙수’.

계자용 빙수기를 꺼내와 얼음을 엄청 갈아 넣고

그만큼 삶은 팥도 많이, 팥이 많으니 젤리도 한 움큼, 얼려놓았던 베리들도 가득,

연유도 듬뿍, 우유도 그득, 초코시럽도 찍찍찍 부욱!

양푼이를 식탁 가운데 놓고 각자 제 그릇을 안고.

미숫가루는 취향대로.

그야말로 먹었다.

 

일수행;

볕 아래서 어려울 거라 그늘 짙어 시원한 곳에 마련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온 높았고, 거기라고 더위가 아주 피해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해가 살짝 살짝 구름 속에 숨기도 하던 걸.

계자(초등)를 위한 준비였다. 청계가 맡은 중요한 일 하나였다.

고래방 뒤란 우물 너머 동쪽개울에서 발을 담그면 얼마나 좋을까,

나뭇잎도 무성해 그늘도 지고.

마을 중심 계곡인 대해계곡에 물꼬 수영장이 있기는 했다.

그곳 거인폭포는 우리가 얼마나 계곡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지를

대단히 훌륭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잘 보여주던 계곡이었다.

다만 가까운 길이 아니어

뙤약볕에 오고가는 지난함이 있기도 했더랬다.

물길도 헤치고 가시덤불을 지나기도 하는.

그나마 새로 그곳에 집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길이 더욱 순탄치 않았다.

올 여름 아이들이 잘 쓸 수 있도록 해보기로.

연어의 날에 샘들 몇이 길을 뚫어놓은 게 있어 그래도 좀 나은.

담을 내려서서는 풀을 뽑고 가지를 치고 돌들을 정리하고.

모기가 달려들고,

날이 더워 긴 바지 입으라고도 못하고, 저들도 입을 생각을 않고.

효진은 도망갔다가 그래도 아주 사라지지 않고 또 오고 또 오고 하며 손을 거들고.

이걸 하자 하면 못 하겠다 안 하고 또 하고.

처음 하는 일일 텐데, 물꼬도 첫걸음인데.

스무 살이 된, 아이였고 새끼일꾼이었고 이제 품앗이일꾼이 된,

윤호샘이 후배들을 이끌고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흙을 파내 도랑 깊이를 더 깊게도 하고,

그곳으로 이르는 뒤란 풀을 낫으로 호미로 혹은 손으로 뽑았다.

일터를 나오기 전 우리가 매끈하게 해놓은 흔적을 둘러보았다. 뿌듯했다.

농기구들을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넣고 장갑을 빨아 널고 갈무리.

 

같이 일을 할 때의 마음에 대해서 살피기도 했네.

이번에 그랬다는 게 아니라 함께 일하면 꼭 그런 마음들이 드러나길래

생각나서 짚은.

때로 일하지 않는 이를 향해 미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 일을 통해 이득은 내가 본다.

내 경험이 된다. 하는 자가 복이다.

억울할 것도 미울 것도 없는 문제이다.

하지 않는 그가 손해이니까.

 

일을 끝내고 모두 숨 돌리고 있을 적

가습이와 제습이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길은 좀 짧았으나.

여러 날 그거 한번이 쉽지 않았다, 풀에 코를 박고 지내느라.

모두 초등 계자 때부터 왔던 이들이라(한 명이 첫걸음이지만 형을 통해 물꼬를 알고 있었던)

익숙하고 그만큼 움직임이 좋으니 이런 여유가 다 있었다.

평화로웠다.

 

저녁밥상에는 여름날 자주 먹는 물꼬표 월남쌈.

열여섯 가지 재료들을 채썰어 놓고.

오늘도 그야말로 많이도 먹었지.

몇 봉지의 쌀종이가 나오고,

소스를 몇 차례나 담아가고.

 

실타래’.

저녁 8, 평상을 두엇 옮겨 둥글게 앉았다.

밤이 내리는 멧골이 좋았어라.

멀리 번개가 가끔 번쩍거리고.

전국이 오후부터 비 내린다고 하는데, 여기는 지나쳤다.

다른 땐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데,

반년 동안의 각자 생활을 전하고 지금 하는 고민을 풀어냈다.

청계는 또 그런 의미가 크다, 한 학기를 산 시간을 톺아보는 다음 걸음을 세우는.

우리는 안전망에 있었고, 깊이 그리고 따뜻하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자리가 필요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답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몫.

모두의 삶은 수고롭다.

우리 모두 한 생을 애써 노 저어가고 있는 중.

 

()단법석’.

가마솥방으로 들어와 먹을거리를 놓고 수다를 떨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눈과 눈이 마주치는, 손전화로부터 눈을 들고,

사람들이 손전화에 코를 박고 있지만 또한 그런 시간을 그리워하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했다.

 

달골 걸어 올랐다. 두멧길 밤나들이에 다름없는.

10시 물꼬를 출발할 때 빗방울 살짝.

오후부터 전국이 비에 들고, 열대야가 가장 심하다는 밤이었다.

우리는, 견딜만했다. 질이 다른 더위니까. 숲에 싸인.

 

, 지하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우릴 맞았지 뭔가.

윤호샘이랑 밥못으로 달려갔다. 물이 계속 틀어져 있었다.

일손을 거들던 샘이 잠그지도, 그걸 전하지도 못하고 잊은.

먼저 씻으러간 친구가 외쳤다.

물이 쫄쫄거리며 나와요.”

가문 데다가 물을 그리 퍼냈으니 물이 잠시 모자랄 법도.

곧 상황은 정상화되었다.

 

갈무리’.

자신들을 키우는 물꼬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야기가 모였더라.

 

씻으러 들어갔던 건호,

옥샘, 이게 뭐예요?”

... 바디로션, 핸드크림?”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거 엄청 비싼 거예요, 유명해요, 좋아요.”

그런 게 왜 여기 이렇게 툭 던져져 있느냐 그런 말이었다.

그래? 선물 받은 건데...

그럼 내가 가서 씻고 발라봐야겠네, 줘 봐.”

겨울 언젠가 모자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그랬다.

프랑스 갔을 때 기락샘이 사다 준 건데,

이런 걸 일하면서 쓰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물건은 쓰일 곳에 요긴하게 잘 쓴다면 그 쓰임이 최상 아니겠는지.

언젠가 기락샘이 그랬지, 마누라는 뭐가 좋은 줄도 모른다고.

맞다. 그런 거 모른다.

그러니 내게 그런 값나가는 것들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같은 것.

허니 부디 유명한 브랜드의 무슨 제품 그런 거 내게 소용 닿지 않는 것.

쓰임에 맞는 좋은 물건을 좋아함, 그게 거리에서 산 것이든 이름 없는 것이든 상관없이.

물꼬에서의 삶은 그런 것.

그걸 아이들과도 잘 나누고 싶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의 시간을 지켜볼 수 있어 고맙다.

잘 커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물꼬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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