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용화가 폈다.”

아침에 만난 부용화가 드디어 꽃 하나를 피웠다.

청계에 맞춰준 아침뜨락의 선물이었다.

 

낮 버스로 아이들을 보내고 설거지를 끝낸 뒤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서자

기다렸던 듯 소나기 들이닥쳤다.

이야! 그대들 보내고 설거지 끝내고 나니 소나기 한바탕!

물꼬 날씨 좀 보시게 :)”

물꼬 날씨가 원래 그렇죠 뭐 :)”

윤호샘의 답문자였다.

 

간밤 달골 기숙사에 닿았을 때 뭔가 문제의 조짐이 있었다.

지하수 펌프 전동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사람도 없는데.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윤호샘과 문제가 될 만한 지점을 찾아 나섰다.

식구 하나가 아침뜨락 밥못에 물을 좀 갈아준다고

낮부터 물을 틀어놓고 깜빡 잊고 알려주지 않았던 것.

다행하다 하고 한 사람이 씻으러 들어갔는데,

! 물이 쫄쫄거리는 거다.

밥못으로 끌어올리느라 지하수 바닥까지 다 퍼냈던 건가...

씻는 것도 씻는 거고 변기 물도 내릴 수 없다는 것.

다행히 몇 십 분이 흐른 뒤 우리는 모두 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뎌진 잠이었고, 그래서 예정보다 한 시간을 늦게 깨웠다.

그래도 아직 이른 아침.

이불이며 그대로 두고

까치집을 지은 머리도 그대로 한 채 눈을 비비며 몸만 빠져나와

농기구들을 챙겨 아침뜨락으로 갔다.

여느 청계라면 12일을 거의 무박으로 보내거나

새벽녘에야 눈을 붙이고 좀 늦게 일어나던 일정이었다.

질감으로는 34일이 족히 될.

이번에는 좀 다르게 움직이기로.

새벽빛을 선물하고 싶었다. 늦지 않은 아침빛이라도.

느티나무 삼거리-지느러미길-돌계단-옴자-오메가-대나무 수로 토끼샘

-아고라-달못-돌의자-지느러미길, 대나무기도처-미궁-밥못-꽃그늘길,

그리고 다시 아고라로 갔다.

말씀의 자리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앉아

다른 이에게 보내는 자비명상 같은 말들이 전해졌고,

윤호샘이 마지막으로 거기서 우리를 사진기에 담았다.

 

아고라 잔디 사이 풀과, 돌의자 너머 측백 사이에 풀들을 뽑았다.

어제 일이 좀 처졌던 효빈이는 재바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앞에 있는 것부터 해내는 게 아니라 마음이 더 바빠서 듬성듬성.

찬찬히!”

제가 그게 잘 안 돼요.

그래도 포기는 잘하지 않아요.”

멋졌다.

 

사내아이들만 모여서 그런가, 다른 때보다 수다가 많지 않았다.

늘 아이들이 일하며 서로 하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상황을 알고는 했더랬는데,

해서 내가 궁금한 정보를 내가 물었네.

두어 시간 일을 하고 9시에 아침뜨락을 나와 학교로 걸어 내려오다.

바로 수행방.

팔단금으로 몸을 풀고 대배 백배, 그리고 호흡명상.

자신의 위한 힘 모으기 잊지 않다.

우빈이와 작은현진이가 12학년, 수능을 앞두고 있다.

10학년까지 뭘 해얄 지 모르겠다던 현진이는 

물꼬에서 새끼일꾼을 거치며 교대를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 때보다 절실한 공부일 테다.

아무리 누가 기도를 온 힘으로 해주어도 내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지.

결국 제 자신이 할 일들이 있다.

열심히 살자. 그러면 나를 위해 에너지를 보내는 이들의 에너지를 다 받을 것.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침밥상을 준비, 효빈이가 와서 부엌 일을 거들었다.

상을 닦고, 커피우유를 만들고, 토스터에 빵을 굽고.

“(제가 딱히) 간절할 게 없잖아요.”

환경 때문에 간절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컨대 배가 너무 고팠다면 배불리 먹는 게 간절할 수도 있는,

그런데, 간절함은 자기가 찾는 거야.

그러자면 힘이 있어야지.

힘이 있으려면 몸을 움직이고 경험들이 도움이 되지.

힘을 자꾸 내야 돼. 사는 일이 그래.

삶은 우리에게 그런 걸 요구하지.”

12학년 우빈이는 자꾸 동생이 걱정이다.

쟤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우빈아, 그대는 좋은 경험들이 많았고, 그런 것이 마음을 많이 키웠고,

학교를 안 다니며 그래서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생각을 했던 사람,

그러나 동생은 또 상황이 다르지.”

“(효빈이가) 아직 애기예요.”

조금씩 변해가니까, 그걸 믿고 기다려보는 거지.

물꼬 와서만 해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잖여.”

 

불 앞에서는 프렌치 토스트가 준비되고 있었다.

잼과 샐러드도 나오고.

모두 갈무리를 하고 글을 쓰는 동안 또 낮밥을 차렸다,

한 끼라도 더 멕여 보내겠다고.

청계에서 처음으로 카레를 먹다.

카레와 짜장을 즐겨먹지 않아서도 그렇지만

뭔가 성의 없는 음식 같아서도 잘하지 않던.

그런데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번은 그러려고.

나가기 전 빵을 먹던 걸 아침으로 돌리고 이번에는 그렇게 상을 차려보았네.

 

요새 아빠랑 같이 출근하는데...”

윤호샘은 아버지 회사에서 오래된 제품을 중고로 파는 일을 한다고.

용돈을 그걸로 받고 있다고. 돈 쌓이는 재미가 있다지.

얼마 전 달골과 학교에 사준 헤어드라이어를 이번에 개시했다.

그걸 사준 재훈샘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리 지금 모기기피제 필요해.” 했더니

돈 버는 윤호는, 당장 주문해주었다.

엄마가 너도 물꼬에 후원해라 그랬다며 칠판에 있던 후원계좌를 찍어가다.

이야, 물꼬가 남는 장사한다. 계자라고 와, 새끼일꾼이라고 중고생으로 써먹어,

어른이라고 논두렁도 돼, 돈도 보태, 손발도 보태...”

건호가 물꼬에도 철봉이 있다면 좋겠다 했다.

그거 프로젝트 해보자.

그러면 윤호가 달마다 1만원씩 후원해서 12만원, 내가 12만원 보태고...”

에너지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 그런 게 하나 있어도 좋겠다.

그대(건호)(어린 날에) 망가뜨린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대 돈 벌 때를 내 기다리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고 친구가 제게 말했다는데,

돌아보다 그 사랑을 물꼬에서 가장 많이 받았다 했다.

물꼬가 세상에 기여하는 한 방법일지라.

마음이 다사로워졌다.

 

돌아가서 다들 잘 닿았노라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이) 사랑한다 말했다. 찡했다.

혼자 진행하던 청계였는데

뒷배 하나 있으니 큰 도움이었다.

물꼬에서 자란 아이고 물꼬의 뜻을 잘 담아주며 큰 윤호샘이었다.

동료이자 동지가 되었다.

딱 필요한 지점들에서 한 발짝 먼저 움직여주었다.

현진이는 갈무리글에는 

'매번 오면 반겨주시는 삼촌이 계시는데 지나면서 삼촌이 조금 궁금해졌'다고 썼다.

이제 보인 거다. 눈이 넓어진 거다. 또 한뼘 성장하고 있었다.

오랜 인연들이다.

우리 아이들의 성장사에 동행해서 뿌듯하다. 고맙다.

 

아이들을 보내고 이불이며 베갯잇이며 빨고

다녀간 자리를 정리하고 햇발동을 나오다.

계자(초등) 준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초등 계자도 열릴 수 있을 것인가.

코로나19로부터 우리는 안전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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