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6.나무날. 짧은 해

조회 수 323 추천 수 0 2022.01.08 16:12:53


학교아저씨가 대문의 낙엽을 쓸었다.

땔감을 마련하고 낙엽을 치우는 일이 학교아저씨의 이즈음 소일이다.

 

앉은 채로 정오가 되었고, 앉은 채로 해가 졌다.

의자를 옮겨가던 어린왕자의 B612 행성의 하루가 생각났다.

오늘 이 행성은 한자리에서 아침이, 점심이, 저녁이, 밤이 흐른다.

어깨를 다쳐 움직임이 순조롭지 못한 요 얼마의 날들.

 

눈을 뜨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뜨개 책에 눈이 갔고,

관심이 간 바구니 사진이 하나 보였고,

곁에 면실과 코바늘도 마침 있어서 대여섯 단이나 떠보겠다고 앉았다.

출근을 꼭 해야 하는 날이 아니었다.

잠깐 학교에 내려가면 될.

몰랐다, 잠에서 깨 물도 화장실을 가지도 않고 이도 닦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눈떠서 바로 앉은 자세가 종일 갈 줄이야.

뜨는 일이 재미가 있더니, 그게 엮여가는 게 늘 신기하잖은가,

뭔가 하나 놓치면서 풀고 뜨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고,

그쯤에서 그만해도 되었건만,

 

어느새 바닥을 뜨고 측면 단을 올리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보편(보통? 평균?)적 수준에 맞춘 책일 텐데,

더구나 초보자를 위한 책이니 얼마나 친절할까,

그런데 나는 어려웠다.

젊은 날의 영민함까지 아니어도 이 정도로 이해가 어렵다니!

머리가 나쁘구나, 좌절했고,

이쯤에서 관둘 수도 있으련 또 하고, 풀고, 또 하고, 풀고.

나중에는 고집이 생기고,

이걸 못하네, 하며 무기력이 일어도 나고,

웬만하면 어째도 짜여지니 조금 이상해도 지나갈 만도 한 지점에서

책대로 되지 않았다고 기어이 풀고 말고,

똑바르고 싶음의 유혹,

다시 책을 뚫어져라 보고...

 

깊디깊은 멧골이었다.

외부 수업은 갈무리를 끝냈고, 안에도 수업이나 상담이 없었다.

전화가 들어올 일도 없었고, 왔다고 해도 저녁에야 들여다보겠지만,

해야 할 전화도 없었다.

찾아올 사람도 없었고, 그러므로 맞을 사람도 없었다.

학교에는 학교아저씨가 혼자 있었고,

오늘 먹을 음식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가 기다리진 않아도 때때마다 해내야 할 일들이 있다.

특히 책상 앞에서 해야 할.

12월에만도 기다리는 책 원고도 있고,

미룬 학교 기록들도 있고.

하지만, 오늘 하지 않는다고 터지는 풍선은 아닌 일이었다.

굳이 오늘 아니어도 되므로 오늘 이대로 앉았어도 되었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찐고구마를 하나 먹고,

 

측면을 다 뜨고 마무리.

, 이건 뭔가?

방향을 이제부터는 거꾸로 해야 한다.

간단한 건데, 그게 어렵다.

원 방향대로 익은 손이 무섭구나,

생각한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듯이 말이다.

잠시 멈춰 호흡을 가다듬고 나니, 하하, 그게 다 뭐라고,

생각이 좀 전환되었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좀 수월해졌다.

그예 했다! 조금은 미련했고, 아니 좀 많이,

더 바쁜 일들을 못했지만,

이 바구니가 무슨 유용성을 지니는 것도 아니지만,

쓸모만이 삶을 밀고 가는 게 아니다.

그리 따지자면 예술이 다 무어더란 말인가.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학이, 그림이 우리 삶을 또 풍성하게 하잖던가.

 

오늘의 수행은 뜨개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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