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14.쇠날. 갬 / 백두대간 6구간 가운데 '빼재~삼봉산'


간밤 빗소리 굵더니만
아침에 개어주었습니다.
하늘, 우리들의 하늘 마음입니다.
오늘은 학기 시작 산오름이 있는 날,
2004년 상설로 학교 문을 열고 한 해 네 차례씩 해오는 산오름에
빠진 적이 없던 젊은할아버지가 처음으로 학교에 남았습니다.
종대샘과 아이 셋, 그리고 제가 오르게 되었지요.

충북 영동에서 도마령 고개를 넘어 전북 무주로
그리고 경남 거창으로 넘는 고갯길,
빼재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아래 신풍령휴게소, 이제는 흔적만 남은 휴게소에
차를 부립니다.
사람이 떠난 콘크리트는 훤한 대낮에도 황막하기만 합니다.

휴게소에서 빼재를 오릅니다.
시작하는 백여 미터가
이 구간에서 젤 가파를 것이란 말이 실감납니다.
백두대간 6구간 제 12소구간 가운데 빼재~삼봉산,
우리들이 오늘 잡은 왕복길이지요.
걸음을 다잡으면 소사고개까지도 가리라 합니다.

낮달이 떠 있데요.
그리 드문 풍경도 아니건만
어떤 일을 앞두었을 때의 낮달이란
다소의 신비감 혹은 비장감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마루금을 타면서는 무난합니다.
높낮이야 있지만 능선인 걸요.
싸리나무와 억새가 밭을 이룬 곳을 지나
된새미기재에 이르렀지요.
“호랑나비다!”
“어디 어디?”
가끔 나비 날았습니다.
반가움으로 모두 소리를 질렀지요.
“너도 이 봄에 태어났구나....”
아직 날기 서툴러 바람에 밀리더니
그 다음 보게 될 때는 안정감이 있었습니다.
한 녀석이 내내 따라다니다가는 어딘가로 떠나면
또 어디메 쯤에서 새로운 녀석이 얼굴 내밀고는 하였지요.
봄날 훈풍을 그들이 불러오고 있었더이다.

산길은 고스란히 명상길입니다.
거치면 거친 대로 편하면 편한 대로
홀로 걷는 길은 자신에게 깊이 침잠케 하지요.
노여움, 분노, 화, 미움, 다 훌훌 털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농도 하게 되는 것일 테구요.
“그만하고 싶다가도
이 아이들과 한바탕 땀 흘리고 산을 넘고 하다보면
그 재미로 또 밀고 나간다니까.”
자연이 있어 고맙습니다.
산이 있어 고맙습니다.
산은 산 그대로, 강은 강 그대로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대운하 건설로
‘강은 없고 운하만 남을까’봐 슬픕니다, 아립니다.

같이 걷는 길은 마음을 열게 합니다.
어떤 일을 함께 하는 이들이 하는 전체모임에서
산행이 좋은 프로그램이 되는 것도 그 같은 까닭일 겝니다.
서로 묻었던 얘기를 꺼내기도 좋지요.
아이들에게 자칫 야단으로 가기 쉬운 주제도
이런 길에서는 의논이 되거나 나눔이 된답니다.
하는 이도 듣는 이도 마음이 산을 닮고 나무를 닮게 되지요.

어데서 비행기 납니다.
가지 사이로 뵈지는 않으나 소리가 꽤나 큽니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로 시작하던
신동엽의 <금강>이 떠오릅니다.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 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서사시의 서문은 그리 이어지고 있었더이다.

길이 퍽이나 수월합니다.
꼭 이곳이어서만은 아니지요.
예전에는 백두대간에서 길을 잃기 쉬운 곳이 한두 곳은 꼭 있더니
요새는 어디고 그럴 일이 드뭅니다.
많이 다녀서도 그렇겠지만
길을 다듬어서도 그럴 겝니다.
그런데 반길 일인 것만은 아니지요.
산길 정비라는 것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하고 도와주는 것이고
또 위험구간에 안전장치 정도를 하는 것이면 족할 텐데,
길을 넓히고 포장하는 형태들이 등장합니다.
그게 정녕 산을 타는 즐거움을 더하기 위함인지요?
역시 흔히 표현하는 대로 마인드의 문제이겠습니다.
어떤 것에 접근하는 방식, 가치관의 차이 말입니다.
산을 산이게 하는 것을 버린다면
그건 산이 아닌 게지요.

호절골재를 향하며 오른쪽으로 금봉암이 드러납니다.
목탁소리 건너왔지요.
마음이 그만 정토가 되는 소리입니다.
볕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늘진 곳은 아직 겨울이었지요.
눈길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호절골재를 넘으면서의 백오십 여 미터는
겨울이어도 한창 겨울이었지요.
눈 속에 아이들 하체가 다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길을 피해 나뭇가지를 헤치며 내려갑니다.

머잖아 1254미터의 삼봉산이
잊고 있던 뭔가가 발견되듯 나타났지요.
넓지는 않지만 삼각점이 있고
‘덕유삼봉산’이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산경표’에는 여기서부터 봉황산(무룡산)까지가 덕유산이라 하였지요.
신풍령휴게소에서부터 4.2 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가방을 열고 점심을 먹었지요.
산죽밭에 들어 볼 일을 보기도 하고
아래를 굽어보며 노닥거리기도 하였답니다.

자, 이제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걸음이 소사고개까지 가능할 것인지.
기존의 두 녀석이라면 산길 5킬로미터를 거뜬히 더 오르내릴 테지만,
하루 산길 13킬로쯤은 일도 아닌 녀석들이지만,
아무래도 처음 합류한 이정이는 그렇지 않겠습니다.
하여 삼봉산에서 소사고개까지의 2.5킬로미터 길을 포기했지요.

돌아오는 길,
뻔한 길을 밝을 때 걸을 것이어
마음 놓고 종대샘 편에 아이들을 먼저 다 보냅니다.
잠시 산중에 홀로 있어보지요.
새 학년도에 새 식구들이 들어오고,
새로 누군가가 들어오면 흔들림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종의 갈등(다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이지요.
그리고 다시 안정기가 오고,
또 새해가 오고 새로운 이들이 만나고 흔들리고...
그리 반복하며 생이 이어질 겝니다.
올 새 학년도를 시작하며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낯선 식구가 오고 마음이 좀 어려웠습니다.
당연하지요.
잠시 마음을 들여다보고 숨을 고르는 시간 됩니다.
산이 또 고맙습니다.
자연이 늘 얼마나 위로인지요.

마지막 백여 미터가 다시 난관입니다.
빼재에서 신풍령휴게소로 내려오는 길 말입니다.
서서히 날도 어둑해지려 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내려온 이들이 삼십여 분이나 길게 기다렸고
기어이 이정이도 자기 힘으로 종대샘 앞세우고 나타났지요.
금새 어둠 밀어닥쳤고
우리는 급히 대해리를 향해 달렸답니다.
가마솥방 밥상 앞에 앉으니 8시였네요.
젊은할아버지와 부엌샘,
그리고 서울에서 기락샘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왜 산에 올랐던 걸까요,
아이들에게 물었더랍니다.
대답을 뭐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산을 통해 뭔가를 담았겠지요,
어떤 공부보다 좋은 공부법일 수 있다는 믿음대로
산오름은 나이를 더하는 이 봄에
우리를 한걸음 성장시켜놓았겠지요.


삼봉산을 내려오다 목놓아 울었네
다리 놓고 몸도 놓고 엉엉 울었네

가끔 비행기가 날았고
나뭇잎들이 부딪혔으며
솔이 바람을 일으켰다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어려워
이마도 땅에 놓고 울었다, 울었다

울 일 없어 울지 않은 게 아니었던 거다
장마에도 볕 드니 나날을 보태며 살았던 게다


다시 새 날을 시작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6476 2014. 7. 6.해날. 낮은 하늘 / 이니스프리로 옥영경 2014-07-16 1905
6475 6월 28일, 그럼 쉬고 옥영경 2004-07-04 1905
6474 2008. 5.4-5. 해-달날. 비 간 뒤 맑음 / 서초 FC MB 봄나들이 옥영경 2008-05-16 1904
6473 2011. 1.22-23.흙-해날. 맑음, 그 끝 눈 / ‘발해 1300호’ 13주기 추모제 옥영경 2011-02-02 1903
6472 2007.11.10.흙날. 썩 맑지는 않지만 / 지서한훤(只敍寒暄) 옥영경 2007-11-19 1899
6471 2005.10.29.흙날.맑음 / 커다란 벽난로가 오고 있지요 옥영경 2005-11-01 1899
6470 12월 13일 달날 맑음 옥영경 2004-12-17 1898
6469 <대해리의 봄날> 여는 날, 2008. 5.11.해날. 맑으나 기온 낮고 바람 심함 옥영경 2008-05-23 1896
6468 5월 25일 불날, 복분자 옥영경 2004-05-26 1896
6467 일본에서 온 유선샘, 2월 23-28일 옥영경 2004-02-24 1896
6466 39 계자 아흐레째 2월 3일 옥영경 2004-02-04 1895
6465 125 계자 이튿날, 2008. 7.28.달날. 빗방울 아주 잠깐 지나다 옥영경 2008-08-03 1889
6464 39 계자 나흘째 1월 29일 옥영경 2004-01-31 1889
6463 2005. 10.23.해날.맑음 / 퓨전음악 옥영경 2005-10-24 1888
6462 39 계자 엿새째 1월 31일 옥영경 2004-02-01 1888
» 2008. 3.14.쇠날. 갬 / 백두대간 6구간 가운데 '빼재~삼봉산' file 옥영경 2008-03-30 1885
6460 12월 14일 불날 맑음 옥영경 2004-12-17 1885
6459 불쑥 찾아온 두 가정 2월 19일 옥영경 2004-02-20 1877
6458 12월 12일 해날 찬 바람, 뿌연 하늘 옥영경 2004-12-17 1876
6457 6월 7일, 성학이의 늦은 생일잔치 옥영경 2004-06-11 1876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