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10.불날. 맑음

조회 수 1227 추천 수 0 2006.10.12 09:29:00

2006.10.10.불날. 맑음


‘하늘방’이 좀 쌀쌀한 까닭이 아니어도
같이도 자자는 아이들 곁에서 자는 10월입니다.
엊저녁 3시도 넘어 잔 터라 늦었나 하고 화들짝 놀라서 잠이 깼는데
아이들이 아주 한밤중이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마침맞게 일어날 시간인데도 말입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
이 달에는 자기가 바라는 방에 들기로 하였는데
큰 아이들이 모여 가장 작은 방인 ‘시방’에 자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워낙에 말수도 많은 큰놈들이 저들끼리 다 모였으니
얼마나 말이 길고 길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아주 늦게 잤다는 고백들이 있었답니다.
한 방이 소란하니 다른 방까지 뒤척였겠지요.
방도 안 닦고 날적이도 안 쓰고
게다 아침에야 샤워를 한다고 오래 2층 욕실을 차지하기까지 해서
기어이 한 소리를 한 아침이었지요.
아, 이런 말은 다른 이가 좀 해주면 참말 좋겠다 싶습니다요.
두 녀석은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줍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두 해엔 머리 긴 여자애들이 많아
줄줄이 앉아 머리를 빗겨주며 나누었던 얘기도 많았습니다.
순간 순간 이렇게 이사 간 아이들이 그립답니다.
가을은 이렇게 오나 봅니다.

좋은 가을날이니 아이들도 바깥에서 ‘손풀기’를 합니다.
이 많은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겠습니다.
하기야 자기 삶에 따라 날마다 보던 것도 새로이 보이는 날도 있겠으나
이 순간 존재하는 것들을 많이 보고 사는 이 아이들이
참말 살아있어 보입니다.
한참 곤충 혹은 벌레라고 불리는 것들과 이야기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오늘은 령이가 호랑나비에게 앉아있어 달라고 부탁하여
정말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그가 가만히 있어 주었답니다.
아, 벌레와 하는 대화법의 핵심은 ‘적개심’을 없애는 것이랍니다.
흔히 우리는 그들이 가진 아주 미세한 독성에
잘 모르면서 지나치게 반응하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존재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번학기 집중교과 ‘사회’시간입니다.
관공서와 주요기관들에 대해 얘기해가자니
얽히고설킨 이 사회의 여러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너무 재밌어요.”
다행입니다.
“내용이 어려워요.”
흔히 학교에서 샘들이 사회과목에 대해 그리 말한다 하고
아이들도 젤 어려워하고 싫어하기까지 한다했으니 말입니다.

국화시간엔 가지치기도 배우고
무성한 꽃밭을 계속 그려 넣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미죽샘의 열정을 보고 있노라면
고맙기도 하고 참 대단하다 싶지요.
단소에선 ‘스승의 은혜’를 불다 조금 어려워
‘올챙이송’을 불었습니다.
“샘, 오늘 저희들이 준비한 게 있어요.”
아카펠라에다 단소를 곁들여
아침에 연습한 ‘군밤타령’을 들려드렸지요.
“야, 멋진데요. 이대로 대회 나가면 되겠어요.”
그리 평해주셨더랍니다.

‘논밭에서’에선 신우재 밤농장을 갔습니다.
영동 읍내를 가자면 임산의 면소재지를 지나
황간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
고개를 넘는 지름길이 나옵니다.
그 마루에 왼편으로 밤밭이 펼쳐지지요.
“이렇게 많은 밤나무는 처음 봐요.”
주인장이 장대로 막바지 밤을 털어주고
우리 식구들이 들어 밤을 주웠지요.
선대의 지혜로 잘 심어둔 밤을
이렇게 후대가 잘 먹게 되네요.
한바탕 허리 펼 줄 모르고 줍다
어느 댁의 산소에 둘러앉아 날밤을 열심히 까먹기도 하였습니다.
다람쥐가 따로 없었지요.
그런데, 어째 조용히 지나나 했더니,
더러 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하던 녀석들 가운데
신기가 내려오다 신발을 신느라고 더듬거리다
그만 밤송이를 밟고 말았네요.
몇 주 전 손등에 찔린 밤송이에 대한 기억에 소스라쳐
막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발뒤꿈치라 아픔은 덜하겠다 싶었는데,
보이는 가시를 빼고도 학교까지 달고 와야 했지요.
곽보원엄마가 열심히 바느질을 했더랍니다.
또, 령이가 동희를 구해준 일도 있었지요.
비탈길에서 그만 비틀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으려는데,
뒤에 있던 령이가 얼른 받쳐주었답니다.
물론 밤송이 밤송이가 천지인 곳이었지요.
좋은 밤은 어떤 밤인가,
보관은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은가에 대해서도 주인이 잘 일러주어서
마침 얼마 전 밤나무를 열심히 공부했던 하루에 이어
아주 훌륭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마을아이 효민이가 병원에 있을 적 맺은 연으로 가게 되었는데
현장학습 뭐 이런 것을 준비하며 여러 정보를 얻고 싶다는 주인의 뜻이 있었지요.
서로 도울 수 있었으니 좋다마다요.

늦어 오늘은 못하겠구나 싶던 ‘우리가락’도
고래방으로 달려들어 한바탕 했습니다.
우리가락을 하고 있으면 뭐라도 하겠다 기운이 납니다.
구미교사풍물모임에서 해나가는 게
가르치는 이에게 자신감을 주어 더 그렇기도 하겠습디다.
워낙에 같이 작업을 해오던 사람들이라
결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저로선 진도가 빨라서 애를 좀 먹기도 하지만
뭔가 이제 풍물수업을 전체로 가늠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되나 봅니다.

주워온 밤을 햇발동에서 야참으로 내었습니다.
다 먹을 수 있을래나 싶게 삶은 밤이 많기도 하였는데,
참말 무서운 입들이네요.
호랑나비와 얘기한 경험이 한창 얘깃거리가 되고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해 서로 나누기도 합니다.
동희는 이번 한가위에 새로 사서 읽고 있는 책을
모두를 위해 기증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자기 좋은 것을 다른 이와 나누는 마음,
우리가 끊임없이 예서 익히려는 것도 그런 것 아니겠는지요.
지난번에 언제 다루어보자던 유전자조작과 복제에 대해서도
오늘 드디어 얘기를 마쳤고
어느 주말에 영화 ‘파리’를 보기로도 하였습니다.
햇발동의 밤은 얼마나 풍성한지요,
또 하나의 배움방이랍니다.
이어지던 어느 얘기 끝에는 제가 유언도 남겼습니다.
죽으면 나무 한 그루 아래에다 고스란히 묻어
죽어서라도 공덕을 쌓게 해달라 하였지요.
어떤 이는 굳이 화장을 해서 그 가루를 묻는 수목장을 권장하기도 하나
죽어 썩을 몸에다 지구에 얼마 남지도 않은 기름을 땔 일은 아니지 않을 지요.
“또 있어. 쓸 수 있는 모든 장기는 기증해줘.”
“어떻게 옥샘을...”
아이들의 당장의 반응입니다.
아하, 바로 이것이
흔히 유교사상에 배인 이들의 생각이 닿아있는 지점이겠다 싶었지요.
아이들을 설득하느라 아주 혼났더랍니다.

오늘은 책을 읽어주는 대신 ‘더그매’(햇발동 3층 다락)에 들어
옹기종기 이불 하나에 발을 모두어 앉았지요.
한데모임을 시작하자마자 바람을 잡았던 류옥하다 선수 덕(?)이었지요.
“아마 모두가 원할 텐데,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구동성이었을 테지요.
뜸을 좀 들이며 결국 그러자 고개 주억거리니
아이들이 지붕이 들썩이도록 소리를 질렀습니다.
‘무서운 이야기 15탄 - 밤 밭 1편’이 그렇게 나오게 되었지요.
정말 밤 밭에 다녀오기도 한 날이니 분위기를 더 탔을 테지요.
언제나 이야기의 배경은 바다가 아주 멀지는 않은 상동리이고
그곳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사이에 얽혔던 얘기가 모티브가 됩니다.
“너무 슬퍼요.”
“감동이예요.”
“무섭기도 해요.”
삼십 분짜리 이야기가 그만 한 시간이 되고 말았네요.
아이들을 하나 하나 안아주고 한 마디 들려주기가 끝나니 10시가 넘어버렸답니다.
녀석들 때문에 속을 끓이다가도
녀석들 때문에 또 사는 게 행복해지기도 하지요.

건너와 베란다로 나서니 기우는 달이 떠있습니다.
결 고운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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