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4.물날. 맑음 / 이장 취임식

조회 수 1256 추천 수 0 2009.01.28 20:55:00

2009. 1.14.물날. 맑음 / 이장 취임식


멀리서 귀한 선물이 왔습니다.
계자가 끝나고 하루를 더 묵어간 진주의 금비네에서
해삼이 한 가득 실려 왔지요.
“... 여기 진주는 남해와 지리산이 품고 있는 아주 작은 도시랍니다. 그래서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곳이죠. 무엇을 보내드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금비 아빠, 그 곳은 산골이라 해산물이 귀한 곳이니 삼천포에 가 보자구 하더군요. 겨울이라 다행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무사히 도착했으니 말입니다...”
가는 것보다 오는 것이 많은 산골살이이니
늘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산골 곳곳 사람이 깃든 곳마다
자근자근 웅크린 자리만큼 자잘한 사건들 또한 심심찮습니다.
시골 마을의 이장 자리는
준공무원이라 할 만치 권세가 적지 않아
그 자리를 둘러싼 재미난 얘깃거리들도 많지요.
어떤 분이 이장이냐에 따라
특히 외지에서 들어와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이들에겐
영향이 여간 작지가 않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사이가 나쁜 이가 이장이어
물도 못 얻어먹고 지냈다는 소식도 있고
군내 어떤 마을은 이장이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 하는 과정에
법정싸움까지 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지요.
또 한 마을은 이장의 오랜 독재가 이어지다
바뀐 덕에 온 마을이 해방의 날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대해리도 올 초 이장님이 바뀌었습니다.
반장 일을 오래 보시던
사람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본동 아랫뜸의 상문이 아저씨로
물꼬 일도 두루 잘 살펴주던 당신이시라지요.
배우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고사하셨지만
경로당 어르신들의 몰표로 당선되었습니다.
하여 오늘 술을 한 잔 내게 되신 게지요.
취임식인 셈입니다.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고 냉장고에다 들여도
아직 한 가득한 해삼을 들고 나갔지요.
“안주가 좋아서 나도 한 잔 해야겄네.”
어르신들이 어찌나 반기시던지요.

“에이, 한 잔 해.”
이른 저녁을 얻어먹고
해질 녘 불을 때러 가얀다고 자리들을 뜰 때
아직 남은 몇이 새로운 상 앞에 앉았습니다.
어르신들의 ‘한 잔’은 늘 겁부터 납니다.
“‘반 잔’만요.”
밥그릇에 따르는 술이 소주 반 병이라니까요.
한 해 동네 이야기를 다 전해듣습니다.
학교가 마을 가운데 있어도 한 번 나오기가 쉽잖지요.
이렇게 계자가 끝난 뒤에라야
겨우 몇 날 얼굴 내밀며 술 몇 잔 오가는 게
한 해 인사가 된답니다.
“어짜노, 우리 뭐시기가 이혼을 했다.”
“다들 그러고 살아요. 요새는 한 집 건너 그렇답니다.”
집안 일들까지도 편하게 나누다 보면
또 그만큼 사이가 가까워져 있고는 하지요.

“같이 가자.”
밤 깊은데 모두 나오던 걸음들이
다시 한 곳으로 몰려갑니다.
“언제 또 학교 밖으로 나와? 교장선생도 같이 가.”
정효자 할머니댁에서 2차인가요.
한선자 할머니랑 성길이 아저씨랑 반장이 된 금순 할머니랑
두레상에 앉았습니다.
거제도에서 사돈에 팔촌이라던가 멸치를 보내왔다며
급히 끓여낸 두부국이 어찌나 시원하던지요.
그러고서도 온 부엌에서
맛난 것들이란 맛난 것들은 다 나왔답니다.
젊을 적부터 한 동네 살며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이즈음의 생활로 이어집니다.
보건소가 없어진 뒤 불편이 많지요.
달날마다 보건소도 약 타러 가는 일이
아주 큰 일인 양반들이 많습니다.
선자할머니는 수술한 손목이 들쑤시는데
파스를 사러 못나가고 있다셨습니다.
“저희 거 나눠 쓰셔요.
학부모 가운데 한의사가 있는데 때마다 파스를 보내주셔서 잘 써요.”
좇아와 몇 개씩 쥐어드렸지요.

내일 또 건너오라는 인사를 받으며
밤 열 시가 넘어 되어 들어왔습니다.
눈물 나게 정겨운 밤이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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