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2.달날. 맑음

조회 수 404 추천 수 0 2023.10.17 11:51:48


수로를 팠다. 물을 잡는 건 계절마다, 비가 온다거나 비가 갔다거나,

아니면 어떤 상황이 보일 때마다 하는 일.

아침뜨락 지느러미길 쪽의 동쪽 끝 가까이 밑으로 가로질러 관 하나 묻었더랬는데,

스며 내려오는 물이 그곳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이고 있었다.

막힌다는 거다.

파고 다시 물길을 잡아주고.

밥못의 계단 위도 그랬다. 계단 곁으로 물길이 있으나 계단에 물이 질척였다.

경사지 쪽으로 바짝 물길을 하나 내준다.

그리만 흘러가준다면 다행하고,

아마도 못에서 스며 나오는 물도 있지 싶은데.

거긴 비닐을 깔지는 않았더랬다. 시간이 흐르며 진흙이 자연스레 쌓여 굳어질 거라 여긴.

여러 날 두고 보기로.

다시 내려와 가위를 챙겨 가지를 치러 아침뜨락으로 들어가다.

아고라 들머리 양편 철쭉 무데기를 정리하고,

무한대 위쪽의 역시 철쭉 무더기를 잘라 모양을 잡아주다.

 

사이집 둘레에 예취기도 돌리다.

잔디깎이로 잔디를 깎고,

울타리 편백 사이 잔디깎이가 하지 못하는 곳은 예취기로.

그런데, 잔디깎이는 잔디깎이, 손톱깎이도 손톱깎이인데,

쓰레받기는 쓰레받이가 아니네!

 

사이집 북쪽 돌담이 언제 무너졌더라?

지난 봄 여러 날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무너진 담을 보았다.

가슴이 움푹 패였다. 북풍이 다 거기로 몰려오는 것만 같았던.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돋운 흙이 기운.

어여 저걸 치우고 다시 쌓아야지 하던 마음이 솟다가,

일에 밀리다가,

이제는 시간을 들이는 중이다. 기다리는 중이다.

다시 땅이 온전히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그래서 그 위로 돌담을 쌓아도 단단하게 버틸 그날을. 시간 밖에 없을.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편히 무너진 담을 볼 수 있게 된.

흉물스럽게 보지 않을 수 있게 된.

 

식구들과 김상봉 선생의 <호모에피쿠스>를 말하고 있다가 기락샘 왈,

옥샘이 푸코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칸트주의자였네!”

무슨 말인가 하면

착한 사람이 최고지!”라고 늘 말하기 때문.

인간에게 참된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직 착한마음씨, 즉 선의지 말고는 없다.’

아니, 칸트는 방대한 서양철학을 집대성한 서양철학의 정수 아냐?

그는 그 많은 공부를 하고 내린 결론이 선의지인데,

나는 직관으로 그걸 알았으니 나 칸트급이네.

아니다, 칸트는 공부를 엄청하고야 그걸 알았는데

나는 그냥 팍 직관으로 알았으니 내가 칸트보다 나은 것 같음!”

그렇게 한바탕 웃었더라.

그러면서 아이들을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세히 뭘 몰라도 뭔가 직관으로 어떤 사실들을 알지 않던가.

아이들도 다 안다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앎.

아직 뭘 대단히 공부하지 않아도 직관으로(자세하게는 모를지라도) 진실을 알고 사실을 알고.

찡하게 아이들이 보고팠다.

 

그나저나 김상봉 선생이 말한 칸트의 이야기를 좀 더 옮겨본다.

그러나 현실상황이 어떻든 오직 선 때문에 그리고 오로지 선을 위하여 흔들림 없이 선을 행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처음부터 

현실세계에 대해 절망하는 법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호모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가운데서)

물꼬에서 살아가는 일이 그런 것이었구나 새로이 곱씹어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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