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날 수확해서 빨래방에 널어서 말린 마늘을
대 중 소로 정리하여 갈무리.
줄기가 다 녹아내려 엮을 수가 없었던.
흙을 털어내고. 축축한 날 수확했던 지라.
너무 늦어 미룰 수도 없었던, 게다 비소식도 계속 있어서.
농사일이란, 다른 일들도 그러하지만, 좋은 날씨가 일의 반은 한다.
벗이 구강세척제와 접이식 카트를 이 멧골로 보냈다 한다.
이가 퍽도 부실한 나인지라.
‘우리 어깨도 허리도 시원찮으니, 들고 메지 말고 끌고 다니자.
바퀴가 작아 흙길 풀길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달고 다니는 것보단 나을 듯. 올캐 장볼 때 갖고 다니는 것보고 베낌.
나도 같이 샀음. 엄마집 오갈 때 차에 두고 쓸라고.’
마음이 먹먹해 망연히 문자를 보다가 답 문자.
‘거참... 너는 참... 너는 잘 듣고 잘 보고.
그게 내 행위들을 돌아보게 함. 잘 못 듣고, 못 보는.
고맙다는 말이 있어 참 다행!’
꼭 시험기간 그렇잖은가, 안 하던 청소하고 괜스레 옷장을 정리하고 하는.
유예시키는 거지, 시험공부를.
올해 내는 책 원고 수정 마감일을 받아놓고 있으면서도
괜히 책장 앞을 서성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보인다.
우리 나이 20대들에 읽던 책.
빼들고 뒤적이다 p.106에 멈췄네.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던 열두 살 그날을 묘사한 대목.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거라 의심하는데,
어머니는 평범하고 차분하게 비극을 감춘다.
시내를 한 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온 순간
그는 엄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걸 발견하는데,
엄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아는 체 않고
그 신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두 시간을 걸었다.
그가 고통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실수하거나 잘못하는 많은 순간을,
우리를 보호하려고 모른 체 해준다.
아이들은 대개 다 안다. 그들은 공기를 알아채는 존재들이니까.
어른의 덕목 하나가 속아주는 지혜이겠지만
아이들은 그보다 더 많이 우리들의 거짓과 잘못을 못 본 체 해준다.
아이들과 지내며
저 아이가 자라서 이 순간을 기억할 거라 생각하면 늘 등을 곧추세우게 되는데.
이미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들의 몸짓과 말을 다 본다.
바르게 살자 모드네. 더욱 건강한 생각으로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