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성당 사순특강(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 ‘교육과 문화’; 2011. 3.23.물날. 날 좋은)

 

 

문제는 대안교육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옥 영 경 (자유학교 물꼬 교장)

 

* 자유학교 물꼬의 봄을 다룬 10여 분 분량의 KBS 영상물을 하나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들어가며

 

혹 보셨을까요, 스티브 핑크의 <Accepted>(2006).

지원했던 8개 대학에서 모두 입학 불합격 판정을 받은 고교졸업생이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고민에 빠집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직접 대학을 설립합니다. 가짜 대학이지요. 그런데 대학 문을 열던 날, 대학 입학에 실패한 같은 형편의 사람들이 우르르 입학을 위해 찾아옵니다. 그들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필요한 것을 배우며, 서로를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즐거운 배움의 과정을 보내지요. 그리고 마침내 학교로 인정을 받느냐 마느냐로 교육심의위원회 앞에까지 갑니다.

“... 왜 둘 다 존재할 수 없나요? ...그대들은 학점과 규칙들, 정치와 상아탑을 유지하시고 저희는 저희 방식대로 하면 되잖아요.

인생은 가능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인정 받으러 왔지만 방금 깨달았어요. 당신들의 인정이 뭐가 중요한가요? 우리가 한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는 건 당신들의 인정 없이도 이미 압니다... 정말로 배우는 데는 선생이나 교실이나 화려한 전통 따위도 돈도 필요 없어요. 필요한 건 오로지 자신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일 뿐... 짓밟든 맘대로 하셔요. (당신들이 뭐라든)우리는 계속 배울 것이고, 계속 자랄 것이며, 우리가 학교에서 얻은 소중한 진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요, 둘 다 존재하면 아니 되나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사람 노릇하는 길이 어찌 제도교육 안에만 있겠는지요. 물꼬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 물꼬, 뭘꼬?

 

 

학교 이념

스스로 살려 섬기고 나누는 소박한 삶,

그리고 저 광활한 우주로 솟구쳐 오르는 ‘나’!

 

 

자유학교 물꼬

'아이들의 학교’이자 ‘어른들의 학교’로

같이 놀고 일하고 수행하며 배우고 익히는 곳입니다.

 

□ 계절자유학교(계자): 여름과 겨울 5박 6일씩 세 차례하며

장애아동 시설아동 저소득층 실직가정아동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모인 44명의 아이들과 자원봉사자 15명 안팎

□ 몽당계자: 봄 가을 주말을 낀 2박 3일의 짧은 계절자유학교.

계자를 경험한 4학년 이상 10명 안팎

□ 빈들모임: 달마다 한 차례 남녀노소 15명 안팎이 모여

물꼬가 하는 생각, 물꼬가 사는 방식을 나누는 자리

□ 수행모임: 춤명상, 절명상, 전통수련...

□ 쉼이 필요한 이들의 쉼터

□ 단식수행: 봄 가을로 5~7일 단식

□ 정서행동장애아를 위한 도움교실

 

자유학교 물꼬

진리에 이르는 길이 꼭 학교라는 제도 울타리에서만 가능한가를 묻고,

사람 노릇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교육의 목표라고 할 때

그것 역시 학교 밖에서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주장합니다.

 

자유학교 물꼬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생태라거나 공동체라거나 무상교육 같은 무거운 담론에

이제는 거리를 좀 두고

어디에서건 뿌리내린 모든 삶의 수고로움에 찬사를 보내며,

이곳에서 나날을 살아가는 일 그 자체가 결과이고

이곳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일 그 자체가 성과인 곳입니다.

 

자유학교 물꼬

농산물 가공을 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으나

산골에 나고 자란 것과 그것으로 만든 몇 가지 물건으로 돈을 사기도 하고,

강연과 글쓰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교육관련 일로 살림을 보태고 있습니다.

 

자유학교 물꼬

새끼일꾼이라 부르는 중고생 자원봉사활동가들과

품앗이라 부르는 자원봉사활동가,

그리고 논두렁이라고 하는 후원회원들의 도움으로 꾸려집니다.

 

자유학교 물꼬

1989년 '열린글 나눔삶터'를 시작으로 방과후활동을 하다

1994년 첫 계절자유학교를 열어 134번째에 이르렀으며,

1997년부터 세 해 동안 도시공동체와

2004년부터 여섯 해 동안 상설학교를 실험하기도 했고

십년 뒤의 생태공동체마을과 이십 년 뒤의 아이들나라(아이골)를 꿈꾼 적도 있으며,

2009년 현재에도 여전히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요.

아닌 줄 알지만 책무와 당위로만 가는 길이 되지 않도록

날이 더워져도 벗지 못하는 외투가 되지 않도록

뚜벅뚜벅 걸어왔던 지난 시간처럼

잘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의 길을 향해 그리 또 발걸음을 떼려 합니다.

 

그리고 자유학교 물꼬

굶주린 이가 먹어야 하듯

아픈 이가 마땅히 치료 받아야 하듯

아무 조건 없이 교육받을 아이들의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까 하는 고민만큼은

놓을 수 없는 숙제로 변함없이 삼고 있습니다.

 

여전히 물꼬는, 꿈꾸고, 나아가고 있지요!

 

3. 새로운 학교 운동, 그리고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대안교육 편에서 보자면 적잖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 제가 현재의 한국의 대안학교운동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 그것에 대해 전면적인 이야기를 할 형편도 아니고, 또 한 때 대안학교(스스로 어느 한순간도 그리 생각한 적 없지만 편의상 분류되기를)로 분류되던 학교를 실험하며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운 경험을 한 사람이어 더욱 이야기할 계제가 못 되지요. 단지 새로운 학교 운동이 이십년을 넘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제가 해왔던 일이고, 현재도 대안교육 혜택을 받은 아이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있으며, 또 대안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제게 오는 상담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결국 제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까닭일 뿐입니다. 가령 제 편에서 제도학교로부터 요청되는 강의주제를 들어보면 거개가 ‘대안교육에서 바라보는 공교육’이 아주 대다수이듯 말이지요. 어쨌든 결단코 대안교육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무엇 하자고 그러겠는지요.

지난 겨울 물꼬에서는 5박 6일의 계절자유학교(이후 계자로 쓰겠습니다)가 두 차례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여러 대안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왔고, 사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꼭 올 겨울에만 있었던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가장 가까운 날에 있었던 일이므로 언급하기 쉬울 뿐이지요. 첫 일정에 왔던 아이들은 전라도권에서 온 아이들인데, 물꼬에는 처음 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사내 애 셋이 같은 학교에서 왔는데, 워낙에 개구진 아이들이었고, 그런 만큼 유쾌하고 재미났었지요.

그런데 그들끼리는 너무나 신났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불편케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자기 주장이 퍽 강해서 타인의 말이 그들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고, 나아가 그들의 주장이 너무 거세서 일반적으로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느껴지는 의견에 조차 다른 이들을 설득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혹자는 그게 어디 꼭 대안학교의 문제이겠는가, 그 아이들을 제도학교에 보낸다고 다를까, 결국 그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공동육아어린이집을 거친 아이들이며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오랫동안 봐온 경험에 기대자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임에는 틀림이 없다 싶습니다. 그들이 드러낸 문제를, 자신의 권리와 생각을 주장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 아이들이 도드라질 뿐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분명 옹색한 부분이 없잖았던 거지요.

두 번째 일정에도 온 대안학교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몇 해에 걸쳐 물꼬의 계자를 오는 동안 제도학교에서 대안학교로 옮긴 아이들이었지요. 말의 결이 참 고운 아이들이었는데, 최근 그 아이들의 말 씀씀이가 거칠어진 듯한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가진 자기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에 대해서는 자원봉사를 온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솔직히 좀 건방지게 느꼈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기도 하셨지요. 제도학교에 대한 비아냥 혹은 무시와 함께 그것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가끔 진보적인 사람들이 비진보적인 이들을 향해 갖고 있는 경멸 같은 것을 그 아이들에게서 쉬 발견하고는 합니다. 내가 좀 다르다, 내가 좀 특별하다는 게 강해서(사실 누군들 특별하지 않은가요.) 마치 진보가 지적허영과 만나 자랑이 돼버리는 경우처럼 말이지요.

특히 그 아이들과 나누는 특정 화제에서 이것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 시대 의미 있게 다루는 문제들이 있지요, 성적소수자들이나 빈곤문제, 인권, 생태 같은 것들요, 이 아이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의견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헌데, 그 아이들이 바람직한 가치관이라는 것에 너무 세례 받고 있어서 때로는 감동을 잃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세계의 숙제들을 공유는 하고 있으나 그런 정보들 혹은 교육에 매우 많이 노출되어 더 이상 감동 없이 그런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선 마음입니다. 마음이 울려야지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은 행동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당위로 이미 잘 알고 있는 대신 더 이상 감동이 없더란 겁니다. 그래서 물꼬가 지닌 가치; 작고 여린 것들을 둘러보기, 일상의 자잘한 편린들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들에 대한 감상, 사이좋게 살기 위해 타인과 관계 맺기, 여러 가지 명상을 통한 평화나누기, 자연이 던져주는 경이, 그런 걸 지니지 못하더란 거지요. 그걸 꼭 그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느냐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것은 그렇지 않은가요, 늘 개인의 특질이란 있기 마련이지요. 그걸 감안하고도 그렇더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도 하나 덧붙일까요? 소고기수입파동이며 전국을 밝혔던 촛불시위를 다들 아실 겝니다. 그때 같이 촛불을 든 분들도 지금 여기 계실 테지요. 그 무리 가운데 아이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따라왔거나 저들끼리 오기도 했지요. 그들이 흔히 우리가 386이라고 일컫는 세대의 자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쩌면 그들은 선험적으로 또 가정환경적으로 일정정도의 진보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겝니다. 물론 아이들은 결코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이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다시 말하면 직관, 혹은 직감으로 선악, 혹은 선호와 비선호를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이 정권의 비도덕성을 향해 우선 촛불을 들기가 쉬웠을 것이며,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봐서도 촛불을 들기가 더욱 쉬웠을 것이고, 그 다음은 그들은 주장이 강한 세대여서도 그랬을 겝니다. 적어도 이 아이들에게 지난 세대가 주체성을 길러준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조차 새 휴대폰에, 명품 청바지에, 돈을 잘 버는 직업에 대한 선호도에 울고 웃습니다. 좀 더 풀자면, 그런 돈 가치 중심은 주류가치관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으실 겝니다. 문제는 말입니다, 대안교육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마치 이 나라의 교육의 문제를 대안교육으로 선회할 수 있으려니 하는 많은 노력들이 있지만, 교육을 받치고 있는 것은 사회이고 결국 그 사회가 어디로 가느냐, 그래서 그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가치관을 지녔느냐 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육은 궁극에 어떤 세계관이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라고도 하는 거구요.

그렇다면, 대안교육이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정말 우리는 이 아이들을 위해 어떤 교육을 내세워야하는 걸까요? 정녕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대로 되던가요? 우리 역시 학교를 다니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르침대로 살고 있나요? 가르친 대로 될 것 같으면 세상이 지금 이 꼴새일까요? 결코 가르친 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고로 ‘보고’ 배우는 법이지요.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잘 살아야 합니다.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으로 사는지 고민하고 그리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도대체 누가 누구를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을 것인가요? 분노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먼저 살아주어야 합니다. 나부터 바로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배울 것입니다!

그러면, 잘 사는 게 무엇이냐 물어야할 테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이 끝났네 어쨌네 해도 그래도 이 세상이 건재한 것은 인간이 결코 저버리지 않은 심성 덕일 것입니다. 착한이란 말을 앞에 수식어로 붙이는 게 더 명확한 정의가 되려나요.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다고 말하는 것도, 세상을 살게 싶게 하는 것도 결국 그런 것들 아니겠는지요. 가난이 가진 품격 같은 것 말입니다. 자연이 가진 것을 뺏지 않겠다, 다른 사람이 쓸 것을 앗지 않겠다 하는 뜻이 바로 그 가난(엄밀하게 말하면 ‘선택한 가난’)에 들어있겠지요. 굳이 찾자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존재를 헤아리는 일이니까요. 우리 아이들이 그것을 익힐 수 없다면 무슨 맛으로, 무슨 기대로 세상을 살아가려나요. 세상 살기 너무 힘들어 뛰어내리려고 올라간 옥상에서 그래도 허공이 아니라 계단으로 다시 내려오게 하는 것은 삶이 주는 아름다운 기억들, 삶에 대한 아름다운 기대들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행복일 테구요.

중언하면, 제가 했던 학교 실험의 끝에도, 다른 이들이 하는 대안학교 실험을 보면서도 대안학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녕 그 모든 것을 관통해서 공통으로 구현하려는 교육이 있을 테고, 그것을 하려는데 결국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나다, 나부터 바로 살기로 결론짓게 되더라는 거지요.

 

4. 공동체 실험, 그리고

 

또 한 편의 영화 이야기를 할까요; 오기가미 나오코의 <안경>.

얼마 전 아이랑 보았습니다.

“딱 엄마 영화네...”

“그래?”

“별 일도 안 일어나고, 걷는 걸 오래 보여주고, 화면이 잘 안 변하고, 말도 많지 않고...”

그러면서 영화의 결말도 점칩니다.

“공항도 슈퍼마켓문이네. 딱 엄마 좋아하는 규모네. 끝까지 봐도 별일 없을 거야. 공항으로 여자가 다시 떠나는 게 끝일 걸요.”

아이들의 직관은 뛰어납니다. 슈퍼마켓 같은 공항, 어쩌면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데요.

‘봄 바다가 진일토록 꾸벅꾸벅 조는’ 남쪽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너무 북적일까봐 아주 조그맣게 간판을 매단 민박집으로(영화가 끝날 무렵엔 아하, 공동체라 부를 수 있겠구나 싶지요) 한 여자가 휴가를 떠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필요한 것만 넣었다는, 하지만 여전히 큰 그의 가방과 달리 해마다 봄이면 이곳으로 오는 사쿠라의 가방은 집 앞에 쇼핑 가듯한 가방입니다.

“여긴 관광할 만 한 곳이 없나요?”

손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을 찾아온 여자, 타에코는 슬슬 구경을 나서려하지요.

그런데, 없답니다.

“그럼, 여기 놀러오는 사람들은 뭐 하러 오나요?”

‘젖어들려’고 온다네요. 젖어들다, 타소가레, ‘사색’을 말합니다. 그 말의 어원이 황혼, 해질녘이라 하니 사색이란 낱말이 더 깊이 이해되듯 젖어들다로 듣고 나니 울림이 커집니다.

그러나 젖어들기가 어려운, 모여든 사람들에도 뭔가 불편한 그는 새로운 민박집을 찾아갑니다.

새 민박집 주인은 타에코에게 호미를 들리지요.

“(이곳에 지내는 동안) 오전 중엔 밭일을 하고요, 오후엔 공부를 합니다. 여기선 협력해서 일하며 서로 믿음을 다져요. 흙에서 자연의 은혜를 느끼고 삶의 참의미를 얻는 거죠. 태양과 우주만물에 경의를 표하며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언뜻 이게 무슨 상황이야 싶다가 그제야 감독의 조소 혹은 야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맞아요, 아까 그 민박집이 감독이 그린 공동체이상형쯤 되었던가 보지요. 느리게 또는 조화롭게라고 깃발을 내건 대부분의 생태공동체, 한때 물꼬가 시도하기도 했던, 그것의 부자유스러움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거기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에코는 그곳을 떠나 다시 앞서의 민박집으로 옵니다. 비로소 가방도 버리게 되지요.

할 말이 많은 영화이지만 공동체 관련 부분만 얘기하지요. 감독의 이 시대 공동체에 대한 야유 말입니다.

우리가 자라온 풍토도 그렇거니와 타인의 삶에 대해 필요이상의 개입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공동체들이 실패한 것도 이 부분에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타자에 대한 배려 부족. 타자에 대한 이해, 받아들임, 그것을 흔히 ‘관용’이라고 표현하지요. 아이들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 특히 다르게 사는 이에 대해 도대체 ‘꼴’을 못 봅니다. 왜 나처럼 살지 않냐고 화내고,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삶이 내 무엇을 빼앗아가는 것도 아니고, 나를 못살게 구는 것도 아닌데, 단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적대적입니다.

‘너’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바탕 되지 않으면 이제 사람들은 타에코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지요. 결국 같이 잘 살려고 했던 공동체였는데, 이제 타자에 대한 안아주기의 부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겁니다. 새로운 학교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든 공동체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든, 그게 아니라 그저 주류 사회에서 살아가더라도, 관용은 결국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힘입니다. 이게 제가 공동체실험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결론이었습니다.

 

5. 나가며

 

마지막도 영화 이야기이네요; 어윈 윙클러의 <At First Sight>(1999).

선천성 시각장애인인 주인공이 새로운 안과기술로 시력을 찾으나 다시 시력을 잃습니다.

“(잠시 시력을 되찾았을 때) 아주 많은 걸 봤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앞이 보였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니까요. 자신이나 타인 또는 인생의 진정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그건 암흑 속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보게 되면 정말 많은 것을 본 셈이 되죠. 그건 눈이 없어도 됩니다.”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걸 누구는 ‘깨어있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이지, 무엇이 정녕 행복한지 진실로 가슴깊이 묻고 그리 살아야 합니다, 현실이라는 것에 발목이 묶여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그것이야말로 ‘교육’ 아니겠는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제 새롭게 물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대안교육이냐 아니냐가 아니라니까요.

 

아쉬움으로 덧붙이는 말.

새로운 학교도 공동체실험도 실패가 더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았을라나요. 하여 가련히 보실까 하여 자랑 하나 할라지요, 뭐 자랑할 것도 변변찮고, 자랑이 있다 한들 사람 귀한 산골 사니 것도 여의치 않아.

오래 전 교사로서 받은 최고의 찬사를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10년을 넘게 같이 일했던 동료가 어느 날 절 불렀습니다.

“옥샘, 옥샘이 왜 좋은 선생님인 줄 아세요?”

“...”

“제가 세상을 돌아다녀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옥샘은 교사로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열 손가락이었던 걸까요?) 안에는 드는 성인일 겁니다.”

도대체 저이가 무슨 말을 하려 저러나 싶었겠지요.

“옥샘은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아, 사람 좋아하는 거 참 쉬운 일일 수 있겠구나, 마음 저 깊은 곳에서조차 미워하지 않기가 정말 어렵겠구나, 그런 생각 들데요. 사랑도 그거 아닌가 싶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

 

두어 해 전 어느 공동체마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곳 교사들이 물꼬 계자에 왔습니다. 그 학교 선생이 저녁이 내리는 마당을 거닐며 아이에게 물었답니다.

“물꼬 좋아?”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아이들이 물꼬를 좋아하는가 궁금했겠지요.

“네.”

다행이었습니다.

“뭐가 좋아?”

뭐라고 했을까요?

“옥샘이요.”

“옥샘이 뭐가 좋아?”

“화를 안내서 좋아요.”

마침 그 선생도 같은 생각을 했더라지요.

음... 정말 제가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일까요? 무슨요. 화냅니다. 야단도 치지요. 소리도 지릅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사람이 아닌’ 아이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아는 게지요. 저게 제 풀에 화가 나서 저런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구나, 아는 거지요. 다 압니다, 귀신같이. 화에 설득이 되니까 그 화가 그들에게 화가 아니었던 게지요.

 

그런데, 이게 말이지요, 애들한테는 되는데 어른들한테는 아니 되더군요. 그래도 나아지겠지요, 그게 희망이랍니다요, 하하. 너도 나아지고 나도 나아지고 그리하여 세상도 나아지리라, 그래서 교육을 또한 하는 것 아니겠는지요...

 

(20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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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영 경 (자유학교 물꼬 교장)

 

국문학과 신학과 교육학을 기웃거리다가 초등특수교육과 유아교육을 공부하다.

작고 여린 존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사람이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게 필요치 않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가난을 택해 산골에서 농사짓고 산에 들어 먹을 걸 얻으며 아이들 섬기다.

아이들과 함께 한 세월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자신이었으며,

날마다 감동하고 날마다 고마운 게 많은 이.

세 해 동안 아이와 함께 일곱 개 나라의 공동체와 자유학교를 돌아보기도 하다.

스물두 살에 시작한 ‘공동체 실험’과 ‘새로운 학교 운동’을 그 배의 나이에 이르도록 계속했고,

지금도 아주 천천히, 그러나 뚜벅뚜벅 걷다.

“세상에서 제일 잘한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자유학교 물꼬 일을 하고 있는 것,

저보다 저를 더 잘 이해하는 것만 같은, 제게 사랑과 치유와 위안인 남편과 혼례한 것,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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