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과 철학 사이 - 김경동

조회 수 4172 추천 수 0 2008.09.28 19:39:00

< 사회과학과 철학 사이 >
- 느낌에서 생각으로


요 즘 세상 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인간이란 이성의 존재라는 명제보다는 사람이란 감성의 동물이라는 주장이 더 실재에 가깝다는 느낌이 피부에 닿아 오는 듯하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인간에게 있어서 생각과 느낌은 틀림없이 사람됨의 기본 요소로서 우리의 삶과 역사를 좌우하는 데 함께 작용하였다.


그 러나 돌이켜 성찰해 보면 볼수록 온통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배우들이 활개치면서 이룩하고 부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을 번갈아 연기하는 한 자리 질펀한 놀이 마당 같은 게 인간 사회가 아닌가하는 믿음만 짙어진다. 이 배우들이 이성으로 곱게 빗질하고 분단장하고, 앞뒤 치수 맞춰 단정하게 옷 지어 차려입고 나선 맵시 탓으로 그들이 다소곳이 가리고 있는 감성이 팔팔하긴 하지만 야하고 사나운 속살이 때로 드러나지 않을 따름일 것만 같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남는 흔적은 이성의 허울뿐 거기 얼룩진 감성의 열기와 광란의 상처만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 컨대 인간 이성이 실현된 모습으로 극치를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산물의 하나가 자연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개발 활용되고 있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기틀 삼아 생성 전개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주체로 자처하는 인간이, 정작 그 스스로의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 생활의 운용 관리에 있어서는 가장 이성 아닌 어떤 것(이성 외적)인 원동력에 떼밀려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제는 웬만한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있고, 심지어는 생명마저 창조할 수도 있는 지식과 정보를 손아귀에 넣게 된 오늘이건만, 오히려 인류를 송두리째 전쟁의 불덩이 속으로 몰아 넣고 한꺼번에 멸망하게끔 할 수 있는 위험을 또한 가장 많이 안고 있는 게 인간 사회의 모습이다. 인간 스스로에 관한 지식, 사람이 이룩하는 사회에 관한 정보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건만 그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사회의 문제들은 역사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더 빠르게 쌓여 가고 있는 게 실정이다.


그 현상도 따지고 살펴보면, 지식의 부족이나 잘못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바탕에 근거한 누구의 지식을 누가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둘러싼 결정 과정에서 작용하는 감성의 충동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이성의 선택을 능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인류 존망의 위험 속으로 마구 뛰어들지 않고 버티는 힘이 이성의 견제력에서 나오리라는 희망적인 믿음조차도 의심의 여지를 보일 만큼, 실지로는 서로 대립하는 감성들의 팽팽한 긴장 관계가 도리어 그 견제하는 힘의 원천일 수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더 이루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설혹 그렇게까지 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야말로 우리는 이성을 더욱 살려 성찰에 성찰을 거듭해야 하고, 이성으로 감성의 충동을 조절해야 할 문명의 단계에 오지 않았나 싶다.


성 찰은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동물에 비겨서든 가장 고도로 발달한 정신 능력이다. 이 능력으로 말미암아 문화가 있고, 문화가 있음으로써 인간다움이 확보된다. 이러한 성찰을 체계적으로 시도한 데서 철학이 태어났다고 하겠다. 성찰은 곧 철학의 요체이고, 철학은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사유의 방법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에는 성찰이 필수적이다. 그것의 성격은 분석이요 비판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고여서 썩은 묵은 앙금들을 우리의 생각과 삶에서 말끔히 걷어 내고, 낡았지만 지혜로운 것들은 되살려 오늘에 맞게 다시 꾸미고, 나아가서는 한층 더 바람직하고 신선한 생각과 삶을 창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성찰의 대상 또한 나 아닌 것들에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를 포함한다는 점에 인간 사유의 특징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발전의 계기가 마련된다고 하겠다.

사 회과학과 철학과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바로 이러한 학문의 자아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유용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어떤 경우이든, 자아 성찰은 한결 같이 그 과정이 즐겁기만 하고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지는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의 약점과 아픈 곳을 가차없이 드러내야 하고, 또 그 결과 상처난 곳은 과감히 도려내야 하는 과정이다.


이 런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의 사회과학(특히 그 중에서도 사회학)을 살펴보아도, 이성보다는 감성의 손길이 더 세차게 움직이는 모습에 접하게 된다. 얼핏 보아 중국의 제자백가 시대를 연상케 하리만큼 다양한 이론적 전망들과 방법론적 접근들과 이념적 지향들이 각축을 벌이는 형국을 이루는 게 오늘의 사회과학이다. 이와 같은 다양성은 오히려 학문 발전을 위해 건강한 증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와 다른 전망들을 비판하고 자신의 것이 옳음을 주창할 때에는, 반드시 이성적인 논의에만 의존하지 않을 뿐더러, 이치를 따지는 논조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거의 맹목적이라고 할 만큼 강렬한, 자기의 믿는 바에 대한 헌신 몰입이 깔려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감정적인 태도이지 이성적인 선택은 아닌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사회과학의 이데올로기성이라 지적하는가 하면, 또 사회과학의 정체성 위기마저 들먹이는 이도 있다.


물론 사회 과학의 정체의식을 둘러싼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역사를 온통 물들여 온 것이다. 한데 바로 그와 같은 다양성의 배경에는 사회과학을 보는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도사리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의 두 얼굴


사 변 철학 또는 형이상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독립 학문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사회과학은 1세기를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철학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어쩌면 앞으로도 끝까지 철학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 적으로, 좀 심하게 말해서, 사회과학과 철학 사이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아이러니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사회과학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학문 분과가 한 번 독립하여 이른바 정상과학의 자리를 굳히면, 그 분야에서는 학문 자체의 정체의식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고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나 겨를조차 없이 과학적 탐구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이런 성향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다 해도, 자연과학의 경우 비교적 뚜렷하다. 경제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일부 사회과학에서도 대체로 그런 안정을 즐기고 있다. 자아 성찰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한 가지 철학적 입장에 뿌리를 내리고 나서는 그 뿌리를 돌이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때 철학과 과학의 관계는 비유컨대 선형적(線型的)이랄까, 일방적이고 되돌아오지 않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 에 반해서, 학문의 자아 비판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경우 철학과 과학의 관계는 순환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과학은 철학과의 인연을 되찾게 되고 뿌리로 되돌아가 그것을 다시 살피고, 새로 뿌리내릴 터전을 또 찾아야 한다. 사회과학과 철학의 사이(차이)가 불분명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위 에서 자연과학과 경제학, 심리학의 경우 비교적 정상과학으로서 안정되어 있는 편이라고 말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늘 있어서 주류를 이루는 표준과학에 대한 도전이 때때로 제기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뿐 아니라 사회학이니 그 밖의 사회과학 분과들 가운데도 한가지 철학에 안주하는 선형적 관계를 유지하는 조류도 있다.


그 러면 안착하는 경우와 회의하는 경우의 차이는 무엇인가? 마치 일상적인 삶에서 만사를 당연시하며 살아갈 때가 행복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아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회의함으로써 오히려 당장에는 불안정하고 혼미할 수도 있다는 유추를 상기할 만하다. 게다가 사회과학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과제를 두고 보아도 차이가 있다. 사회에는 갖가지의 문제들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의 요청이 사회과학에로 계속 쏠리고 있다.


이 런 상황에서 자아 성찰에 매달린 사회과학이라면 서로 다른 자아상 또는 사회상을 제시하는 학파나 조류들이 현실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구구 각각의 해결책을 제시하게 되던가, 아니면 극단의 경우에는 전혀 현실감각과는 동떨어진 논쟁 속에 스스로 휘말리게 된다.


한 편 자아 성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는 사회과학이라면,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이 확실하므로, 그 바탕 위에서 개발된 기술을 적용하여 그것을 분석 평가한 데 입각해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되는 처방이나 해답을 제시하게 된다. 간단없이 회의하고 엇갈린 주장에 휩쓸리는 쪽에 비하면 일관되고 일사불란한 것이 특징이다.


하 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표면적인 혼란보다도 더 심각한 쟁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처럼 깔끔한 접근에서 얻은 정연한 대답이 과연 유일하고 가장 적합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불 행하게도 사회과학 자체 속에는 그 어느 한 가지의 산뜻한 진단과 처방이 반드시 유일하고도 가장 올바른 것인지를 가려낼 만한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가령 기술적인 효율성의 기준에서 지시된 해답의 적합성에 관한 판단은 단순히 기술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가치 기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성찰을 강요받다시피 하는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셈이다. 사회과학과 철학의 사이(관계)가 다시 미묘해 지는 것은 이 둘이 바로 그와 같은 도덕성, 윤리적 판단, 또는 가치 판단으로 얽히게 될 때이다.


요 컨대 철학한다는 것은 생각을 올바로 하는 길을 찾는 일이다. 이를 성찰이라는 사유의 과정으로 표상하고자 했다. 그 요체는 인간 이성에 힘입은 논리적 사고이다. 또한 인간에게 특징적인 자아 성찰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과학의 경우에나 또는 사회 전체에 있어서 창조적 발전의 계기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가치 판단의 요소가 함께 깃들어 있음을 보았다.


철학 교육에 부쳐


철 학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고도 사회과학의 지식을 습득, 활용하는 일은 가능하다. 이 때 사회과학의 지식이란 주로 기술적인 지식을 일컫지만, 본디 성찰적인 과정을 거쳐 생산된 지식이라 해도 그것을 제3자가 철학함이 없이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지식이 그것을 학습화는 개인의 삶이나, 그것을 산출하는 사회과학 자체에게나, 또는 그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마당인 인간의 사회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데 있다.


그 러면 먼저 유식이 무식보다 낫다는 믿음부터 따져 보자. 이 명제는 우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또 하나의 상반된 상식적인 믿음을 연상케 한다. 앎의 괴로움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때의 앎은 단순하게 습득한 성찰 없이 주입되어 얻은 지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성찰이 내포하는 번민의 요소를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우월성 혹은 열등함을 따지려할 때 성찰을 거친 앎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


여 기에서는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고 습득한 사회과학의 지식을 성찰과 무관한 앎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 성격은 대체로 기술적인 것이며, 따라서 실용적인 효율의 기준에 의거하여 그 우열을 판가름하는 그런 지식이다. 이미 정해진 목표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판은 하지 않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하여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이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는 종류의 지식을 일컫는 것이다.


단 적인 보기로, 초, 중등교육에서 주입식으로 암기하여 얻은 것이 대부분 이런 지식이고, 누구나 의심의 여지없이 추구하는 상급학교 입시라는 실용적 목표에 가장 효율적이라 믿는 바의 것이다. 아니면 텔레비전 퀴즈쇼에 나가서 장원이나 퀴즈왕이 되는 데서도 매우 유용한 것이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는 취업을 위한 시험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대학을 다니게 되는 학생들에게는 또 그 나름의 연장선 위에서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 지만 실존적인 사회 생활은 그런 성격의 지식을 직접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상황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는 과정들로 엮어져 있다. 거기에 정말 필요한 것은 성찰을 겪어 터득하는 앎이요, 지혜이다. 기실 성찰의 바탕 없이 암기하여 갖게 되는 지식은 비유컨대 시험 답안지에 옮겨 적은 순간부터 망각의 영역으로 홀연히 사라지기가 일쑤이다.


그 렇다고 수단적인 지식이 아예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며, 교육 과정에서는 이른바 도구 과목이 한 몫을 반드시 차지한다. 그러나 교육의 참된 구실은 어떤 지식의 내용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앎의 과정을 훈련시키는 일이요, 그렇게 터득한 지식과 지혜를 삶의 마당에서 끊임없이 내려야 하는 판단과 결정에 현명하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키우는 일이다. 그러한 교육의 요체는 성찰이며, 성찰은 철학하는 일의 본성이라 했다. 이런 뜻에서 철학 교육은 일찍부터 이루어질수록 좋다는 말이 된다. 철학이라면 굉장히 어렵고 추상적인 양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삶에 아주 가까이 있고 친근한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철학관을 갖게 된 데에는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도 한 가닥 책임이 있을 줄 안다.

성 찰 없이 맹목적으로 빨아들인 사회과학의 지식은 그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교조적이고 폐쇄적인 사회관을 갖게 할 것이다. 성찰 없이 누적된 사회과학의 기술적인 지식을 비판 없이 활용함으로써 초래하는 결과는 자칫하면 우리의 사회를 일차원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게다가 지식의 권위에 대한 맹신까지 곁들이게 되면, 그런 지식의 소산으로서 권위주의적이고 기술 관료적인 사회의 조직 원리가 횡행할 것이다. 그리고 성찰할 줄 모르는 사회는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없고, 질문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으면 마땅한 대답이 나올 길 없을 것이며, 질문과 대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대화가 끊기고 말 것이고, 대화가 없는 사회는 한 마디로 답답한 사회일 것이 틀림없다.


뛰 어난 성찰력이라는 소중한 보배를 지닌 인간에게 그것을 일깨우고 장려하는 일을 포기해 버린 교육이라면, 그야말로 비인간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릴 때 집안에서부터 성찰하는 법을 키울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철학 교육이 초, 중등 교육 과정의 핵심을 이루어 마땅하다.


- 김경동 / 서울대 교수, 사회학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5 먹거리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조작식품 물꼬 2009-01-30 3954
34 먹거리 간장의 종류는 4가지로 분류... 물꼬 2009-01-30 4885
33 농사 풀과 나무를 발효시켜 '효소'와 '반찬'과 '닭모이' 만들기 물꼬 2009-01-24 6315
32 농사 채소 병충해 방지하는 10가지 무공해 재래농약 물꼬 2009-01-24 4957
31 배움 10살 전 아이에게 꼭 심어줘야 할 5가지 품성 물꼬 2008-12-12 3382
30 공동체 브루더호프 물꼬 2008-11-05 5907
29 농사 효소 만드는 법과 효능 물꼬 2008-10-28 4124
28 농사 갈무리채소 물꼬 2008-10-28 4418
27 농사 김광화님의 무경운농법 물꼬 2008-10-28 4918
26 월리엄 코퍼스웨이트의 < A handmade life > 물꼬 2008-10-19 4096
25 <안티쿠스> 휴간에 부쳐-사회과학과 철학 사이를 읽고 물꼬 2008-10-21 4212
» 사회과학과 철학 사이 - 김경동 물꼬 2008-09-28 4172
23 ...젊은 청춘들에게 바친다-박상필 물꼬 2008-09-28 4296
22 공동체 2003년 5, 6월 품앗이 달모임 갈무리 물꼬 2003-06-04 8386
21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 신상범 물꼬 2008-06-04 4579
20 탈학교 논쟁 - 류기락 물꼬 2003-02-08 7874
19 생명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깨달음 - 옥영경 물꼬 2003-02-08 7086
18 공동체 생태공동체와 교육에 대하여 - 이병철 물꼬 2003-02-08 5331
17 배움 또 하나의 저항방식 - 옥영경 옥영경 2003-02-08 5735
16 길눈밝힘 16 - 보름달 그이 물꼬 2008-09-11 3727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