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밝힘 13 - 오늘은 염치가 있었는가

조회 수 4430 추천 수 0 2004.07.19 17:01:00
오늘은 염치가 있었는가
- '현장르포 제3지대' 방송 뒤

옥 영 경 (자유학교 물꼬 교장)


순애에게.

겁나게 덮쳐오는 건 단풍드는 산만이 아닙니다.
저녁답에 밀려드는 어둠처럼 이 오월의 녹음도 그렇게 성큼성큼입니다.
얼마만입니까,
어린 날을 함께 보낸 뒤로 이 십 년도 더 지난 일이겠지요.
그 세월이 선뜻 순애야, 하고 막 부를 수 없는 까닭이 되었기도 하겠고.
아이 러브 스쿨이며 동창 찾기 모임이 한창일 때
더러 옛친구들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내 만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불행해서 되려 행복했다던 어느 소설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를 키워낸 것이 가난한 그 시절이 틀림은 없겠으나
현재 삶의 공유점 없이 과거 안에서 허적인다는 게
크게 의미가 있으려나 싶었던 듯 합니다.
지난 십 여년 사이 신문이며 잡지에 오른 물꼬의 소식을 보고
연락이 닿았던 이들이 더러 있기도 했으나
그 때 잠시 통화 한 차례 한 게 전부였지요.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마난.
늘 '지금 여기'를 사느라 더 지독했으므로.

97년 여름의 'MBC 2580'에선 20여분 밖이라 그랬는지
한 시간여 물꼬를 다룬 이번의 '현장르포 제 3지대'에는 미치지 못했지요.
텔레비전이 갖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거나 하는,
아니면 대중취향으로 치우쳐 정작 그 핵심 특질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과장없이 물꼬를 담았다는 긍정적인 면에서의 이번 방송은
소리없이 사는 산골 오두막의 삶을 세상으로 잘 보내주었다고들 합니다.
물론 대안교육이니 하는 게
워낙 유행처럼 번지는 시기라 더욱 그러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만났네요.
그게 아니었다면 또 얼마나 시간이 흐른 뒤 연락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아침부터 아이들이 만들어준 감꽃 목걸이를 걸고 다녔습니다.
봄 학기 마지막날이라 작은 산오름을 하자 하고
들꽃도 익히며 걷노라는데 뽕나무 아래를 지났겠지요.
입술이며 손이며 새까맣도록 오디를 따먹고
돌아서는데 이젠 저만치 탐스럽게 복분자가 웃더랍니다.
산그늘에서 고요하게 명상도 하고 책도 읽다가
내려오는 길엔 죽순을 한가득 꺾어와 저녁밥상에 올렸지요.
모내고 고구마 심고 포도순 따고 고추밭 매고
이곳에선 그렇게 농삿일처럼 아이들을 섬기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모자라기 이를 데 없는 집이고 학교지요.
허나 사람이 사는데 그리 많은 게 필요치 않으니
어려울 것도 없는 살림입니다.
돈이 없어서도 가난하지만
있어도 별 쓸 일없는 깊은 산골 한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이지요.
사람이 너무 많이 쓰면 다른 존재가 쓸 게 부족할 거라는 자각,
내가 너무 많이 누리면 다른 이의 굶주림과 고통이 따른다는 깨우침,
그래서
우리가 높은 생활 수준에 연연해하는 것이 얼마나 죄악인지,
사람으로서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인지를 날마다 되새기는 이곳입니다.
방송을 보고 자신이 물꼬로부터 느껴왔던 감동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분노한 몇 논두렁들이야 물꼬 열혈충성인이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다만 이 곳을 묘사하는 낱말이 학교이기보다
공동체여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좀 남습디다.

방송 아니어도 찾아드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 이곳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하는 이들 줄이 더 길어졌습니다.
만들어진 곳에 보내기는 얼마나 쉽더이까.
그런데 이런 곳이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이런 뜻있되 가난한 곳이 살아남게 힘을 보태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그것도 이기지요.
무임승차입니다,
이런 곳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나
그것을 위해 아무런 움직임도 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아주 잠깐 대단한 무엇이라도 되는 냥 눈을 들이밀다가
그만 몇 날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그 왜 북한의 아이들 굶어죽는다 난리인 잠시의 방송에 돈 몇 푼 보내면서
내일 아침이면 죽어가는 그 아이들을 그만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훗날에 나이 먹고 돈 벌면 어려운 이들을 보살피겠다고들 합니다.
그땐 이미 늦으리,
그런 표어가 있었지요.
나눔은, 내가 쓸 것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주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쪼개는 거 아니더이까.
저는 우리 동창회 기금에서도 그런 나눔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단 한 푼 보탠 적 없는 제가 말하기 저으기 민망도 하나.
물론 그 나눔이 굳이 물꼬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마다요.

"세계 어디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깊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저질러진 불의이건 상관없이.
이것이야말로 혁명가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다."
제 수첩 앞머리에 적힌 에르네스트 체 게바라의 말입니다.
<좋은 일>(작은 것이 아름답다 노래한 '프리츠 슈마허')의 한 구절도 옮겨 두었지요.
"나는 결코 낙담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탄 배를 더 좋은 세계로 데려가 줄 바람을
내 손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서 돛을 올릴 수는 있다."
얼마 전 저는 노 문학평론가의 말을 그 아랫줄에 적었습니다.
"가난을 받아들이거나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삶의 전락이 아니라 高揚(고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로가 충만한 세상을 위해서
뭔가 염치있게 살자는 말이지요.
날마다 나는 오늘 염치가 있었는가 물어야겠습니다.
아니었다면 내일은 염치가 있어야겠습니다.

다만 물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좀 하겠다는 것이
말이 길었네요, 다 잘난 체입니다.
읽는 이가 더 너그럽길...
참으로 착했던 한 친구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도 기억해준 사실은
제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찔레향기 짙은 오월,
기쁨 또한 그리 넘치소서.

(2004.05.28.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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