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 신상범

조회 수 4578 추천 수 0 2008.06.04 23:42:00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 신상범

― 니시오카 츠네카츠 지음 / 최성현 옮김 삼신각 / 1996


신상범(두레일꾼)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은 아스카 시대의 직인, 궁목수에 관한 책이다. 궁목수는 절, 궁전, 신사 등 대형 건축물을 전문으로 하는 목수들로서, 이 책에서 우리는 나무를 다루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본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자란 나무를 역시 그 형태와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이용하는 목수의 자세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특히 그들이 나무를 다루는 마음이 아이를 다루는 마음과 다름이 없다고 볼 때, 이 땅에 교육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사람의 제 몫을 하는 직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로 기억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책으로 익힐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득을 따져서는 궁목수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이득 되는 일에 집착하면 마음이 혼탁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논밭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없을 때는 농사를 지어 자기 자신과 가족의 양식을 얻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궁목수라는 직업의 일 중의 하나인데, 낡은 목재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해 두고 3년이나 길게는 10년 동안 건조시켜 준비를 해 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법륭사는 이러한 그들의 준비에서 이미 그 기초가 다져졌다고 볼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교육정책을 만들며,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외치기만 하는 교육 행정가들은, 그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본문을 인용해 가면서 책의 내용을 짚어 보자.

"생육 장소에 따라 나무에도 각기 다른 성질이 생깁니다. 산에서 나무를 보면서 이것은 이러한 나무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용하자. 이것은 이러한 나무이기 때문에 좌로 비뚤어진 저 나무와 짝을 맞추면 좋겠다. 이러한 것을 산에서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그만두고 나무의 성격이 나오지 않도록 합판으로 해 버린 것입니다. 나무가 가진 성질, 개성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깔이라고 하는 것도 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방법에 달린 문제입니다. 성깔이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만, 잘 사용하면 그 쪽이 오히려 좋은 일도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개성을 생각해서, 그것을 살려서 쓰는 쪽이 강하고 오래 갑니다."

나무에는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령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가 목재로서 쓰여졌을 때부터의 내용 연수입니다. 그 수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목수의 역할입니다. 천년된 나무라면, 적어도 천년이 가도록 하지 못하면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나무를 잘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살아온 만큼의 내용 연수로 나무를 살려서 쓴다고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당연한 의무죠. 나무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의 합작이 진짜 건축입니다.
이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나무를 잘라 그것을 건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생명이 긴 건물로 짓지 않으면 안되는데, 거기에 저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무시하고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목수의 직업관이자 자연관이다. 현대사회의 지속 가능성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제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살아온 만큼의 내용 연수로 나무를 살려서 쓰는 것, 최대한 나무의 성질을 살려서 쓰는 것, 즉 자연의 순리대로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이 지녀야 할 가치관이 아닐까.

목수가 존경받지 못하게 된 것은 메이지 시대로부터입니다. 서양 학문이 들어오고 건축학이라고 하는 것이 위세를 떨치며, 직접 나무를 만지는 목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설계를 하게 되고부터입니다. 학자가 있고 건축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이 있고 비로소 학문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책은 꽤 읽고 있습니다만, 실제의 일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다 자신의 학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학자들은 우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번 실제로 해보고 나서 그 때부터 학문을 한다거나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아이들이 있고 교육이 있는 것이다. 교육학, 교육 이론이 우선시되어 현장에 적용하고 짜 맞추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교육학에서 많은 이론을 배우고 익힌다. 아이들 앞에 서 본 경험은 전혀 없는 채 잘 짜여진 지도안을 가지고 수십 명의 아이에게 그대로 적용시킨다. 우선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모두 눈앞의 것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 지어진 건물은 그 뒤 몇 십년, 몇 백년, 건물에 따라서는 천년을 넘어서 있게 되고,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96년 여름의 삼풍백화점 붕괴를 기억할 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이 그렇다. 그 큰 건물을 지탱하는 엿가락같은 철기둥을 기억할 것이다. 당장 눈앞의 것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참상! 과연 그 영혼들은 고이 잠들었을까?

우리들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정성껏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온 정성을 다해 한다, 이것뿐입니다.

그들은 가장 기초적인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도구를 손질하는 법, 다루는 법, 나무를 이용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정성을 다한다. 최선을 다한다. 책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궁목수로서 그들은 오직 나무를 다루는 일에 사심 없이 정성을 다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나무의 성질을 최대한 살려 이용할 줄 알며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은 건물은 백년, 천년을 넘어서 남는다. 그러면 우리의 교육은 어떠해야 할까.

도제 제도는 처음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똑같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을 리가 없는 일입니다. 부모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 데서 자란 자들이 똑같아질 수가 있습니까? 형제도 다르잖습니까?

도제 제도는 명확한 이론과 수치를 가지고 가르치지 않는다. 끌은 어떻게 갈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다만 한번 보여주면 그렇게 되도록 직접 갈아 보는 것이다. 그 중간중간의 실패 과정을 통해서 끌을 완전히 익히는 것이다. 빨리 배울 수도 있고 늦게 배울 수도 있다.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해봅니다. 그것을 몇번이고 거듭해서 손에 기억시켜 갑니다. 머리로 생각해 본 것을 실제로 해 봄으로써 손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머리와 손을 연결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교육의 방향이지 않을까. 교육은 실제적이고 경험적이어야 한다. 단지 교과서만을(솔직히 순수한 학문, 지식도 아니지 않는가!) 외고 문제를 풀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송세월을 보내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평소 개성, 개성하며 시끄러울 정도로 들먹이다가도 가장 중요한 교육에 관련이 되면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장작 교육이라고 하면 개성을 신장시켜 가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학생을 정해진 그들 눈에 통과시켜 모두 똑같은 물건으로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하고 있는 학생 전원을 똑같은 물건 취급을 하며, 틀에 맞춰 지식만을 집어넣으며 경쟁을 시키는 방법이 교육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모두 각자 다릅니다. 구전에 전해지듯이, 싹을 키운다고 하는 것은 '자라난 방위대로 사용하라'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제자를 기르는 방법에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전부 자신이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그리로 억지로 몰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리입니다. 나무 사용법과 같이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잘 보고, 그 사람의 좋은 점을 키우고자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른다고 하는 것은 어떤 형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키우는 것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것은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교육, 가르치고 기르는 것은 위의 말대로 그 사람의 개성대로 키우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다. 교육 현장에, 과연 얼마나 자율이 살아 있을까? 우선 교권의 권위의식부터 사라져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마지막 말은 교육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던져 주고 있다.

농부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땅의 생명을 잘 보고 배워라. 자기 한 사람의 노동으로 몇 사람을 먹일 수 있느냐

궁목수들이 나무를 다루는 마음과 아이를 다루는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무를 다루듯이 아이들의 영혼을 보살피고 온전히 자라게 하는 것. 이 세상에 밥으로 나서 밥이 되어 밥으로 남게 하는 것이다. 교육은 교육학처럼 무슨무슨 이론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소우주같은 영혼들을 몇가지 교육이론으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미래의 선생님을 꿈꾸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빽빽이 외어야 하는 교육학자들, 그들이 말했다는 무슨무슨 이론들, 안정된 직장, 안정된 생활? 예비 선생님들을 모두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임용고시 전형도 많이 바뀌고 있다. 실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시강도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목수가 자연과 나무를 생각하듯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 나아가 인간된 마음가짐을 헤아리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점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이를 하늘처럼 섬기자는 것이다.
열여덟 번째 계절 자유학교 때의 일이다. 대학 동아리 후배가 품앗이 일꾼으로 같이 갔었다. 10분이 멀다 하고 싸우고 울던 박동준이란 2학년 아이를 달래 놓고 와서 한 말, '전 못하겠어요.' 울상이었다. 진심으로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온 정성을 다해서 아이를 만났다. 누구도 선생으로서 완벽할 수는 없다. 정성껏 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온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이의 마음자세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생각해야 한다. 남과 더불어 살 때 행복해 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연의 모든 생물을 아우르는 생태계의 연관고리를 알아야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현실이 직면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물려 줄 의무가 있지 않을까.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개인주의, 여기에서 비롯되는 온갖 비리와 모순, 불평등한 제도와 구조, 사람 사이에 층이 지는 슬픈 현실, 제도 속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지독한 모순 덩어리의 시대를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자.
남을 더불어 생각하게 하는 교육,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다를 수 없다는 가치관을 심어 주는 교육. 그리하여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자.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 <노 임팩트 맨>(콜린 베번/북하우스/2010) / 류옥하다 물꼬 2011-09-07 6413
13 <닥터 노먼 베쑨>(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실천문학사/1991) / 류옥하다 물꼬 2011-09-07 8565
12 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1962) 물꼬 2010-10-11 6630
11 독자의 권리/다니엘 페나크 물꼬 2010-02-25 6009
10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권합니다-<아름다운 집>(손석춘/들녘) 물꼬 2009-06-06 4631
9 <흰 지팡이 여행>(에이다 바셋 리치필드/사계절)을 읽고/류옥하다 물꼬 2009-05-25 5147
8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류옥하다 file 물꼬 2009-04-20 4945
7 월리엄 코퍼스웨이트의 < A handmade life > 물꼬 2008-10-19 4096
6 <안티쿠스> 휴간에 부쳐-사회과학과 철학 사이를 읽고 물꼬 2008-10-21 4212
5 사회과학과 철학 사이 - 김경동 물꼬 2008-09-28 4172
4 ...젊은 청춘들에게 바친다-박상필 물꼬 2008-09-28 4296
»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 신상범 물꼬 2008-06-04 4578
2 탈학교 논쟁 - 류기락 물꼬 2003-02-08 7874
1 생명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깨달음 - 옥영경 물꼬 2003-02-08 7086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