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밝힘 11 - 집안으로 자연을 들이는 슬기

조회 수 4175 추천 수 0 2004.07.19 11:39:00
옥 영 경 (자유학교 물꼬 교장)

첫눈이 내렸습니다.
지난해는 시월이었다 하니 더디기도 한참 더딘 눈입니다.
춥긴 추웠던지 맨발에 반팔로 다니는 '하다'도 털외투를 걸치고 나옵니다,
앞을 다 열어젖히기는 합디다만.
어른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들이랑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기 시작하네요.
요새 물꼬엔 적지 않은 식구들이 함께 삽니다.
뉴질랜드의 한 공동체로 공부를 떠난 사람을 빼더라도
어른 다섯에 아이 셋,
그리고 손발 보태러온 품앗이에 입학문제로 오가는 사람들까지
밥상에 스물 남짓 모이기 일쑤랍니다.
아무리 품성 좋은 이들이 모였다하더라도
어디나 사람살이 매한가지듯
말하자니 쫀쫀하고 안하자니 복장터지는 일이 여기인들 왜 없겠는지요.
그래도 서로 날설 때조차 상처입히지 않음은
오랜 세월 명상과 요가, 거울보기와 깊이보기를 통한
물꼬 나름의 영성훈련이 한 몫 단단히 하는 까닭이겠습니다.
게다가 우리를 둘러친 산이, 들이, 내(川)가,
마음을 보다 너그러이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겠지요.

억울하고 분할 일이, 없이 산다고만 있더냐
목이 다 숴서
갈 데 없어 찾아든 월류봉은
속도 모르고 깎아지른 바윗길로 악수를 청했다
...(줄임)
용 몇 마리쯤은 하늘로 올랐음직한
깊은 그림자의 내(川)아니라면
오지 말라 가파르게 늘어선 봉우리 앞
오래 서성거리다만 돌아섰을 걸
해 기우는 냇가 인적은 드물고
용서 안될 만치 말 안 듣게 섰는 바위에
아직 묻어있는 햇살 깔아
웅크리고 누웠다
많이도 노여웠구나,
급히 가던 냇물이 고개 돌려 아는 체를 한다
낙엽을 물들이던 가을빛도 등을 쓰다듬고
나뭇가지 사이 뵈는 양지바른 이쪽 무덤도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눈을 뜨고 앉으니 세상은 여전할세
멀찍이 어느 틈에 왔나, 낚시줄을 던지는 두 사내
나도 슬쩍 그 찌를 타고 간다
상처가 아물라면야 세월도 필요하겠다만
피는 멎더구나, 월류봉에선

; '월유봉'(영동 황간 한탄팔경) 가운데서

하기야
깊은 숲에 자리잡았던 어느 공동체도 뿔뿔이 흩어지더란 소식을 듣고 보면
결국 자연과 사람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관계를 푸는 것이
역시 공동체를 일구는 큰 부분임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래도 도회에서라면 분명 우리는 더 피폐하고 공격적이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학교가 이 산골에 있어서 좋습니다.
우리가 이 산골에 살아서 참말 좋습니다.
펜실베니아에 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머물던 때,
비가 오래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날 식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짚단들이 여기저기 들어와 있는 겁니다.
지푸라기 온통 풀풀 날리며.
"나가지 못하니까 밖을 안으로 들인 거지요."
깎아지른 절벽같은 빌딩들이 둘러쳐있어도
집안에 짚 한 단 끌어들이는 슬기,
바로 자연을 들여놓는 기술이겠네요.
부디 숲이 당신 가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해발 400미터가 넘는 이 깊은 골 아니어도
춥기 어데고 매한가지일 겨울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소서, 또 뵙겠습니다.

(2003.12.8.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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