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댓거리에 있던 글을 옮겨 놓습니다.


< 길눈 밝힘 1 - 그때, 정녕 중요한 얘기 중이셨나요 >


옥 영 경(자유학교 물꼬 교장)


애쉬필드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찬도스 거리 마당 넓은 집, 주차장으로 개조해놓은 방이었지요.
한국에서도 학교 선생들과 공동체생활을 하던 터라 예서도 사람들과 밥상 앞에 모여 앉는 걸 유쾌해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만. 사람들은 더러 밥을 먹으러 때로는 차를 마시러 혹은 술을 마시러 찾아왔습니다. 밤늦도록 사는 얘기를 나누다 새벽빛을 받으며 함께 산책하고 돌아가는 이도 드물지 않게 있었지요.

하루는, 결혼은 했으나 아직 아이는 없는 여자분이 놀러왔습니다.
따로 방이 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저희 집 아이 '하다'는 물론 우리 곁에 있었지요.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 두고 온 장난감들과 학교 풍경, 특히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이모 삼촌들을 많이도 그리워하던 하다였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겠지요. 어른들 얘기 틈에서 자기는 자기대로 할 말이 많습니다.
"어른들 얘기하는데 끼면 안돼!"
엄마야 아이의 처지를 이해하니 그에 답도 해주고 그러다 하던 얘기를 잊으면 처음부터 다시 하기도 한다지만, 그 여자분은 자신의 얘기가 자꾸 끊어지니 참다 참다 짜증에 가깝게 아이를 타이릅니다.
"젖먹이 적부터 엄마는 엄마 삶이 있지, 너는 니 삶이 있구, 엄마가 니 친구랑 얘기하는데 방해하고 그러면 좋겠니, 뭐 그런 말들을 해보지만 자기도 잘 안되나 봐요."
엄마는 엄마대로 그만 미안해져서 안절부절입니다.
그런데요, 잠깐만!

아이가 저토록 하고 싶어하는 일을 막을 만큼 우리가 그토록이나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만 말하라고 아이를 윽박지르면서까지 우리가 정녕 그렇게나 중대한 얘기를 했던 것 맞을까요. 사람이 당장 숨이 넘어가는 일도 아니고, 지금 끓고 있는 물에 갓난 아이가 손을 담그려고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무에 그리 다급한 일이 있다고 우리는 아이더러 가만 좀 있으라며 우리 얘기를 유지해야만 했을까요. 정말 긴요한 얘기였다면 아이가 잠들고 난 뒤 해도 됐을 테고,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해도 되지 않았을지요.
우리는 친구랑 놀고 있는 아이한테 밥 먹으라고 부르고, 외출하니 따라 나서자고 부르고, 추우니 들어오라고 부릅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건간에 가서, 혹은 불러들여서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아이가 그의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데두요.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티를 읽으며 잠 못 들던 숱한 젊은 밤들이 떠오릅디다.
라즈니쉬의 <황금빛 유년의 추억>도 생각났지요.
유년시절에 자신에게 허용되었던 자유가 자기 영혼을 얼마나 살찌웠던가를 추억하는 얘기였던 듯합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그러한 시기가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거나 가르치다 보면
'버릇' '습관'이란 것을 놓고 오래 고민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다잡아서 버릇을 잡아야지 않을까,
지금 좋은 습관을 들여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서는 어림도 없지 않을까, ...
그런데 그런 고민의 한 바탕은
물론 우리 아이들이 정말 좋은 사람으로 자라는데 길을 닦고 싶은 것일테지만,
사실 다른 한 바탕에는 어른의 이기가 있음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 잘못 키웠다는 그 욕을 견딜 수 없는 거지요.
또 하나 덧붙인다면, 그 윽박은 어른들 편의를 위해, 그렇게 하면 어른들이 편하니까 하는 윽박 아니었냔 말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가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 생을 뒤흔들고 또 생을 바꾸어주는,
얼마나 숱한 계기들이 우리 생에 복병처럼 숨어있던가요.
저어기 길에 엄마 손 붙잡고 가는 저 아이에게 젊은 날의 한 만남이,
어린 날의 책 한 권이 생을 어디로 바꿀지 누가 알겠는지요.
어느 시기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아이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는 시기가 있어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고 받아들여주던 기억을 통해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는 것 역시 너무나 소중한 일일 것입니다.

만만찮은 인생길,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우리를 살리지 않던가요.
좀 버릇없는 아이에게 "너 못쓰겠구나.", "그러면 안돼." 하기 전 "너, 그게 너무 하고 싶었구나.", "너도 할말이 참 많은 거구나." 그렇게 먼저 말하는 어른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가 잠시라도 마음이 환해지지 않을지요.

(200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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