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밝힘 2 - 병원에 가야지요, 하지만

조회 수 3329 추천 수 0 2008.06.04 23:36:00

* '댓거리'에 있던 글을 옮겨 놓습니다.

< 길눈밝힘 2 - 병원에 가야지요, 하지만 >

옥 영 경(자유학교 물꼬 교장)


머리가 찌근찌근하셔요? 편두통이라 생각이 든 당신은 아스피린이나 게보린을 찾겠지요. 아님 또 다른 제품의 두통약을 찾습니다. 자주 머리가 아픈 당신에게 그 약은 예전처럼 효과가 있는지요?
오늘은 그 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학교에는 계절학교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흔히 캠프라고 하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삼도가 만나는 삼도봉 아래 골짝에 있는 학교에서 병원이래야 40분 차를 타고 읍내에 나가야 있습니다. 그러니 혹여 아이들이 심하게 아프기라도 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지요.
계절학교 하는 동안 아이들은 여러가지로 아픔을 호소합니다.
"선생님, 배가 아파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실제 몸이 아프기보다 마음이 불편해서 일어나는 현상일 때가 많습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거나 친구랑 싸웠는데 분이 안 풀리거나 선생님이 제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마음이 안 좋아도 병이 될 수 있단다.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아이들은 얼마 안되고 선생은 많으니 아이들에게 일어난 작은 사건들이 금방금방 귀에 들어오므로 먼저 아이의 마음을 쉬 캐낼 수 있습니다.
"현우가 아까 많이 속상하게 했지?"
그러면 울음을 터뜨리며 제 맘을 드러내지요. 다독거리면 어느새 아프던 배가 그만 멀쩡해집니다. 맺힌 마음이 풀어진 거지요.
물론 실제 몸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시냇물에 가 본 적 있니? 저 위에서 흙탕물을 만들어도 흘러가면서 어느새 맑아진다. 우리 몸도 그렇게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는 힘, 그걸 자정력이라 하는데, 그런 힘이 있어. 병균이 몸에 들어와도 스스로 이기는 힘이 있는 거야."
힘들지만 약없이 한번 이겨보자 합니다. 아파하는 조그만 녀석이 안쓰럽지만 견뎌보자 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은 병을 정말 쫓아내지요.
그래도 안될 때가 왜 없겠는지요. 그러면 준비한 약을 발라주거나 먹입니다. 그런데 그 약이란 것이 약국에서 파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마련한 약입니다. 매실즙이거나 달여놓은 생강차거나, 그 밖에도 학교 둘레에서 캐온 구절초 뿌리거나 바위취거나 명아주거나 말린 약초들, 때로는 부엌에 있는 파, 두부, 밀가루, 사과, 배, 어떤 땐 지압을 하거나 수지침을 놓을 때도 있지요.
"약국에서 파는 약이 준비는 되어 있단다. 그렇지만 자연에서 우리 몸이 왔으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자연 안에 있을 거야. 니가 낫는데 더딜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효과는 있는데, 어떠니, 니가 너무 힘들다면 파는 약을 먹어도 된다. 그렇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만든 약을 써보지 않을래?"
고통이 아주 심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듣습니다. 밖에서 들인 생약과 자신의 의젓함으로 아이의 병은 곧 낫지요.
한 번은 어느 계절학교를 시작하던 날 큰 사고가 났습니다. 나라 곳곳에서 영동역에 모인 서른 여명 아이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학교에 미리 가 있던 선생들이 쌈밥을 해 마을 들머리 개울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서 하늘이 연못같은 풍경에 모두 어찌나 신이 났던지…. 그 때 몇 어린 녀석들은 길가 비 내리고 고인 웅덩이에 돌을 던지며 서로 물을 튀기고 있었는데 마음이 급했던 한 녀석, 웅덩이에 들어간 돌을 되집으러 들어간 겁니다. 그 때 상대편의 돌 하나가 아이 입술에 맞았지요. 모든 게 갑자기 정지되고 선생들이 뛰어가고.
119구조대에 연락을 했지요. 금새 그들은 달려왔습니다.
계절학교를 오래 다닌 녀석 가운데 하나 그 와중에도 소리칩니다.
"선생님, 우리는 병원 안 가잖아요."
"이런 경우는 아니야."
네, 그런 경우는 병원으로 가야지요. 그 때 선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까이 보이는 약초로 지혈을 하는 것과 순간 부모가 가장 그리울 그 아이에게 진정으로 엄마 아빠가 되어 주는 것 말고는 없으니까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우리가 약과 너무 익숙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약이 상품화 되고 그것이 광고까지 등에 업고 너무 우리 가까이에 와 있는 게 아닌가 말입니다. 약이 정말 도저히 몸이 가진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병일 때 먹는 게 아니라 기호식품처럼 먹고 있는 게 아닌지. 약을 먹을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라 어느 이름의 약을 먹을 것인가가 더 중요한 고민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우리 몸이, 평생을 지고 살 우리 아이들의 몸이, 보다 독립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몸이도록 우리의 '약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여담 하나.
저희집 아이 '하다'가 기침하다가 제 머리를 만지고 하는 말,
"엄마, 아무래도 나, 두부 사와야겠어. 밀가루는 있어?"
열이 나면 으깬 두부에 밀가루를 얹어주는 걸 저도 생각한 거지요. 그거 진짜 효과 있습니다요.

(20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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