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밝힘 5 - 느림에 대하여

조회 수 3556 추천 수 0 2004.07.19 09:26:00
옥 영 경(자유학교 물꼬 교장)

오랫동안 소식이 궁금하던 제자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엊저녁 그가 보내온 이메일을 받았지요.
"… 잡지에서 여전하신 선생님과 곁에 새로운 얼굴 '하다' 사진을 보았습니다 …"
영민하고 생각 많던 '배마미'는 그 이름 때문에라도 쉬 잊히지 않는 제자지요. 한 해 전에 시드니에 와서 지금 TV제작을 공부하고 있답니다. 7-8년 전 함께 공부하던 그때 자신의 생각이 많이 자란 듯하다고.

그립습니다, 그 아이!
우리 생애 그런 시기들이 있지요, 특별히 내 사유의 세계가 성큼 자라는 시기.
때로 책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하고 사람을 통해서이기도 한.
저희 학교에서는 일과 예술과 명상을 통해 예술통합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을 다하여 몰입하는 것도 명상이고 영성수련이겠지만 새벽, 요가를 끝낸 뒤 그 자리에 바로 앉아서 하는 명상은 우리에게 특별히 사유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이른 아침 침묵하면서 풀을 매는 것도 그 시간의 연장이지요.
"아이들 속에서도 침묵이 가능하네요."
처음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시간이 멎은 듯한 그 시간에 저으기 놀라워합니다. 풀을 한 곳에 모으고 호미와 장갑을 제자리에 두고 난 뒤 생각을 나누는 자리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호미질을 하며 느낀 우주적 관점(물론 이건 아이들이 쓰는 낱말은 아니지요)을 꺼내놓습니다.
"질경이 아래서 벌레 한 마리가 나왔는데…"
아이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를 가만히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들을 서로 나눕니다.
그러고보면 사유라는 것 말입니다, 아마도 '빠름'의 저 편에 있는 말인 듯합니다.
생활, 정말 빨라졌지요.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시간을 줄여주는 물건들이 널려 있습니다. 집안 일에서 특히 그 편리함은 빛을 발하는 듯한데 빨래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세탁기, 설거지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식기세탁건조기, ….
그런데 정말 우리의 생활은 나아졌는지요?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에게 상을 차릴 여유가 당신에겐 있는지요? 우리 세계의 도구와 기계들이 분명히 그 자체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들이지만 사실 삶의 속도는 더 빨라지지 않았는지요. 시간을 줄여주는 기술을 갖게 됨에 따라 그 줄여진 시간만큼 채워진 다른 것들이 삶의 속도를 외려 더 빨라지게 하지 않았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빠름들이 정녕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물론, 일단 자동차와 버스들이 있으면 걷거나 짐승을 타고 가는 선택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정적인 활동들, 사유의 시간들을 잃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거지요.

저희 학교에서 계절학교가 열리면 서울은 물론이고 포항이며 광주며 곳곳에서 아이들이 모입니다. 착착 시간들이 갈라져 돌아가는 구조에 익숙한 아이들은 처음 너무도 느린 시간들에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밥을 한번 먹을래도 쌀을 씻고 불리고 불에 올려 뜸을 들이는 시간까지 기다려야지요, 감자볶음 한 번을 할래도 곳간에서 감자를 꺼내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썰고, 한번 놀래도 함께 모여 놀잇감을 만들고….
그러나 빨래하러 학교 뒤 시냇가에 모일 때쯤이면 그 옛날 빨래터의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처럼 재잘거리며 어느새 우리 생활에 스몄던 빠른 기술과 시간을 떠나 비로소 인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시간에 휘둘리고 사는지를 어렴풋이 생각케 되지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내' 시간들 말입니다.

'하다'는 자라는 동안 엄마랑 떨어지지 않고 지냈는데, 교사회의가 있는 날에도 예외없이 곁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가 울면요? 그러면 우린 쉬었다 하지요.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아이를 달래놓고 회의는 이어집니다. 아주 긴박한 일이 아니라면 회의는 다음 번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시간이, 세월이 좀 먹냐구요.
"아이랑 있으면 세월이 없지."
아이랑 걸어가고 있으면 더러 곁을 지나는 할머니들이 그러셨어요. 그래요. 아이랑 있으면 시간 없는 법이지요. 왜냐면 아이라는 존재가 시간에 둔하니까요. 지까짓 것들이 무에 바쁠 게 있겠는지요. 그런 아이들에게 내 약속에 늦을까, 내 일을 못 볼까, 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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