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밝힘 12 - 일하는 아이들

조회 수 4305 추천 수 0 2004.07.19 16:58:00
옥 영 경 (자유학교 물꼬 교장)

봄도 없이 여름 앞에서 서성이는 햇볕입니다.
그대의 이 봄은 어떻답니까.
2004학년도 입학을 앞둔 아이들이 공동체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제는 포도밭 풀을 마저 뽑고 거름을 뿌렸지요.
어제는 원추리와 쑥을 뜯고 캐서 저녁 찬거리로 내놓았습니다.
오늘은 우물가와 사택 오르는 길에 자갈을 깔았습니다.
햇살은 이미 거칠어 온통 얼굴들이 달아올랐습니다.
자갈을 삽으로 퍼서 들통에 붓는 이, 손수레로 혹은 들통으로 실어다 쏟는 이,
그걸 다시 깔고 펴는 이로 일은 나뉩니다.
물이 옵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마시는 한 모금 물은 얼마나 귀한지요.
어제 캔 쑥으로 만든 쑥버무리를 새참으로 먹고 다시 삽을 잡습니다.
햇살은 아직도 달아있습니다.
자갈더미만 향해있던 허리를 펴는데 앞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녹음이 성큼입니다, 날마다 차 오르는 푸름이 느껍습니다.
일, 할 만합니다.
한숨 돌린다고 든 고개에 빌딩 숲이 펼쳐졌다면 고되기 한량없었겠지요.
다섯 시가 금방입니다.
삽이며 썼던 도구들을 제자리에 두고 장갑을 벗어 통에 담습니다.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갈무리를 했지요.
오늘 일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얘기 바퀴를 돌립니다.
자기가 한 자기 노동을 되씹어 보기로 합니다.
- 열심히 했다. 힘들어 쉬기도 했으나...
아이들도 동의합니다.
- 자갈을 들통에 퍼담았는데 나중에 빠져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처음 꺼낸 그에게 우리는 눈이 동그래집니다.
수레를 밀고 싶다고 먼저 하고 있던 다른 아이랑 싸우다
스스로 그 마음을 내린 것도 칭찬 받습니다.
- 힘들었지만 열심히 했다.
너나없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 할 때마다 불러야했던 비자발성과
일을 일같이 하지 않은 불성실에 한마디씩을 보탭니다.
그러나, 스스로 열심히 했다 하니 자기 힘껏 한 건 아닐까 살펴주자 합니다.
- 많이는 못했지만 애썼다.
좀 미안하다싶은 음성입니다.
다른 이가 불러서 일을 시작했지만
따로 놀기만 하던 그가 일을 같이 해서 좋았다고들 평가해줍니다.
- 통과!
일을 별 하지 않았으니 할 말도 없습니다.
여덟 살부터 일을 하기로 했으니 다른 이들이 괜찮다 고개 끄덕여줍니다.
그렇지만 놀고만 있으면 일하던 형아 누나들이 같이 놀고플 것이니
그 마음을 헤아려 할 만치 해 보라 권합니다.
- 처음엔 열심히 했지만 나중에 게으름이 났다.
아니다, 그럴 때 쉬고 또 하면 되지 않느냐,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
그가 일한 걸 본 사람들은 애썼다 말해줍니다.
- 수레로 사람들을 태워주느라 일을 열심히 못한 것 같다.
자갈도 많이 실어나르더라고 확인해주던 아이들은
수레를 태워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습니다.
갈무리 하자고 불러도 엉덩이를 못부치던 아이들입니다.
누가 말하고 있어도 제 말만 하던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숙연하다할 만치 진지하기만 한 갈무리 자리가
저으기 놀랍습니다.
일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고 또 하겠지요.

(4337.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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