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다에게 있었던 세 가지 일>

옥 영 경



1. 생일

“엄마아!”
하다는 신이 났습니다. 오늘이 생일이거든요.
“너, 희진이도 온다 그랬구나?”
희진이를 좋아하는 남자 아이들은 많지만 희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엄마, 희진이가 날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에게, 김칫국!”
“치, 아들 잘난 것도 모르는 엄마...”

친구들에게.
태어나서 기뻐.
태어났기 때문에 아름다운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흙도 보아서 기뻐.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들을 만나 기뻐.
그런 날을 같이 잔치 열었으면 좋겠어.
너희들이 왔음 참말 좋겠다.

때: 1998년 6월 14일 일요일 낮 2시
곳: 대해동 698번지 하다네집
가져올 것: 집에서 만든 음식 한 가지(다섯 아이 정도 먹을 것)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낸 초대장입니다.
“예뿌다!”
초대장을 줬을 때 누구보다 희진이가 예뻐했습니다.
“니가 만든 거야?”
“우리 엄마가 가르쳐주신 거야. 생각보다 간단해.”
“꽃잎을 말리려면 시간 많이 걸렸겠다.”
“아냐. 엄마랑 꽃 사러 갈 때마다 버려진 것들 얻거나 아님 선물 들어오는 꽃을 책 사이에 끼워 말렸어. 때론 길 지나다 작은 들꽃이나 풀도 예쁜 게 있음 그렇게 말려둔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습기를 먹는 약품이 든 상자에 꽃을 넣어두면 이틀이면 돼.”
“나도 낙엽을 주워서 사전에 끼워둔 게 있는데, 언제 가르쳐줄 수 있어?”
“그러엄. 있잖아, 이거 우리 엄마 아빠 혼례 하실 때도, 왜 청첩장이라는 거 있잖아, 그것도 이렇게 보내셨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일에?”
“아니. 꼭 올 사람들만 모시고 잔치를 하셨기 때문에 그럴 수 있으셨대.”
하다가 희진이랑 오래 얘기를 하고 있자 남자애들도 몰려왔습니다.
“야, 그런데 음식을 가지고 오라는 거 정말 재밌다!”
영식입니다.
“물론 가져올 수 있는 사람만 가져오면 돼. 아무거나 집에서 밥상에 오르는 거면 된다구, 특별할 음식이 아니라. 특별한 음식이야 정작 내가 준비해야지.”
“그런데 다섯만 초대한 거야, 음식을 그렇게만 준비하래게?”
“아니, 나머지는 우리 엄마가 준비하시지. 이런 게 음식부조래. 엄마한테 귀띔 받은 거야. 옛날 어른들은 잔치가 있을 때 그랬대. 특히 장례식이 있고 그러면 그 집 주인이 너무 슬퍼 정신이 없잖아. 그럴 때 이웃에서 음식부조를 하곤 했다는 거야. 우리 나이도 이제 음식을 할 수 있는 나이 아니냐구, 엄마가 이제 이렇게 생일 잔치를 해보재. 엄마 아빠 혼례식 때도 그랬다구.”
“그렇지. 우리가 열두 살이나 먹었지.”
“재밌겠다.”
화장실에서 늦게 나타난 창호가 끼어듭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하는 거야? 시내 가서 맥도날드나 케이에프씨, 또 티지아니 그런데서 안 해?”
어이구, 그러니 맨날 뒷북이란 소릴 듣지.“
“그러면 음식하는 아줌마 불러서 해?”
“무슨 소리야? 그냥 모여서 같이 밥 한 번 먹는 거야. 그런 거 상상하면 실망할 거야.”
“야, 창호야, 주책 좀 그만 떨어라.”
“그런데 만약 음식이 겹치면 재미없잖아.”
“그러니 미리 의논하자니까.”
“엄마들한테도 여쭤봐야지.”
“그래, 그래.”
“야, 정말 잔치네.”
“정말로 같이 잔치 준비하는 거네.”
“잔치, 잔치, 여얼렸네!”
2주일 내내 하다네들은 잔치 준비를 했습니다. 자기가 음식을 할 줄 모르거나 음식을 못 가져오는 아이들은 잔칫날 일찍 모여 하다네 집 청소와 방을 꾸미기로 했지요.

“어서들 와라.”
상이 푸짐합니다. 가운데는 떡으로 만든 케이크도 있고 과일과 과자와 빵이 있습니다.
“빵도 만드신 건가 봐요.”
“아니, 옆집 성구네 거란다. 아줌마가 그러시더라, 하다 생일 선물 뭘 줄까냐고?”
“그래서 아줌마가 잘하시는 빵 해달랬구나...”
“그럼, 이 미역국두요?”
“애들도 참, 그 정도는 엄마가 해야지.”
“야, 우리 엄마 인심 쓰시는 것 좀 봐. 사실 과일도 이모들한테 내 생일선물로 받은 거지, 과자는 외할머니한테 사달랬지...”
“배고프다.”
“얼른 촛불 켜.”
“한마디만 더하고. 이 초도 말야. 글쎄, 우리 엄마 아빠 혼례 때 썼던 청홍초래. 우리 엄마 아빠 혼례 때 옷도 후배가 만들어주고, 엄마 머리 화관도 직접 만들어 쓰시고, ... 그래서 두 분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겨우 오만 구천원이었대. 믿어지니?”
“우와!”
희진이도 놀래면서 하다를 쳐다봅니다.
“아줌마, 여기 재료들은 떡볶이 할 건가 봐요.”
“그래, 같이들 해봐라. 하는 법도 적어뒀다. 놀 꺼리야.”
창호가 잽싸게 말합니다.
“정말 신선한데요.”
“국 식겠다, 일단 밥 먹고. 일부러 밥은 반공기만 펐다. 먹고 더 먹으렴.”
엄마 아빠 혼례 얘기를 더 궁금해 하는 친구들 때문에 정작 생일상을 받은 하다는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자꾸만 희진이랑 눈이 마주쳤거든요. 희진이가 참 많이 많이 웃었거든요.

2. 화이트데이

“엄마아!”
“너 희진이랑 같은 반 됐구나.”
새 학년 첫날 하다가 신이 난 까닭을 엄마는 대번에 눈치챘습니다.
하다는 이제 손꼽아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말입니다.

하다 생일 이후로 소문이 났습니다. 희진이에게도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있다구요.
“나라니까.”
“희진이가 그렇게 말했어?”
“엄마, 그걸 꼭 말해야 알아요?”
“사람 맘을 어떻게 아니?”
“어휴, 정말 도움이 안 된다니까.”
“다른 남자일 수도 있다는 거지.”
“아이참, 우리 엄마 맞어?”
엄마가 한 번씩 놀릴 때면 정말 희진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자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희진이에게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어볼 순 없었습니다.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5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돌아와서 반 아이들 모두의 관심은 발렌타인데이에 있었습니다. 2월 14일인 그날은 무슨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평소 마음에 두었던 남자에게 여자가 사랑고백을 할 수 있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졸업식도 있고 입학식도 있고 종업식도 있고, 정신없이 바쁜 날을 더 바쁘게 했죠.
2월 14일, 교실에는 초콜릿 천지였습니다. 여자 아이들이 꼭 한 남학생에게만 주는 게 아니라 여러 명한테 주었거든요. 또 오히려 못 받을 것 같은 남학생들한테 동정표가 가서 초콜릿이 더 많이 가는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 남학생들도 자기 책상에 누군가 넣어준 것을 편지만 쏘옥 빼고는 모두 모여서들 먹었습니다. 작은 잔칫날이었지요.
“야, 너는 희진이가 안주데?”
“......”
“혼자막 먹으래?”
옆에서 창호가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째째하게...... 편지만 혼자 보면 될 거 아냐.”
그렇지만 하다는 받지 못했습니다.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반 아이들이 죄다 받았는데......
청소가 끝날 때까지 희진이에겐 소식이 없었습니다. 하다는 자꾸 엄마가 놀리던 생각이 났죠. 아이들이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봤지만.....
일어났습니다. 어느새 운동장에도 아이들이 몇 없었습니다.
“이거.”
교문 앞에서 희진이가 하다를 불러주었습니다.

발렌타인데이에 받은 초콜릿을 남자들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에 사탕으로 응답하는 거랍니다. 그래서 백화점이고 빵집이고 별의별 사탕이 다 나오는 3월이지요. 하다가 기다린 3월입니다.
“엄마, 나 좀 도와주실 생각 없어요?”
“포장?”
“아니, 고르는 것부터.”
엄마랑 나들이를 갑니다. 명자 아줌마가 하는 빵가게도 가보고, 시내 백화점에도 가봅니다.
“내가 참 별일을 다 해본다. 벌써 이거 며느리감 시중드느라고......”
하다 엄마는 백화점에 갈 일이 별 없으시거든요.
사탕 값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엄마는 영 못마땅했습니다.
“엄마, 그렇지만 일년에 단 하루뿐인 걸요.”
“자기만의 날을 갖는 건 어때? 칠석날 흰떡을 나눠 먹는다든지, 예쁜 유리컵에 담아서 말야.....”
“올해부터는 칠석날을 챙기는 게 좋겠다고 영식이 생일날 벌써 우리들도 생각했어요. 그치만......”
“희진이한테 빨리 챙겨주고 싶다?”
좀 더 돌아다녀봅니다.
“차라리 저 호두를 사지 그래?”
하다가 그곳을 쳐다봅니다. 앞서 걸어가던 엄마가 돌아봅니다.
“뭐하니?”
“엄마,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뭘?”
“저거요.”
“호두?”
“네.”
“정말 저걸 사려구?”
“네. 포장이야 바구니에 담아 망사 같은 걸 씌우면 될 거구, 그냥 사탕포장하듯이요.”
“그러네. 포장이 걱정일 거야 없지. 엄마가 또 한 포장하잖니.”
희진이가 바구니를 받고 잠시 서 있다 천천히 말했습니다.
“하다야, 넌 참 괜찮은 친구 같애.”

3. 설

설입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다들 바쁩니다. 하다도 물론입니다.
일찍 집집마다 차례를 지낸 동네 어른들이 늦은 아침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서 같이 지내는 차례가 있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립니다. 대해동이 편한 것은 그런 넋들이 고마움으로 마을을 지켜주기 때문이래요.
점심 먹은 뒤론 동네 친구들이 모여 세배를 다녔습니다.
“그래, 새해에도 좋은 일이 많아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하다는 또 희진이를 생각했습니다.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다니까.”
희진이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가 삐죽거리며 하시는 말씀이지만, 또 생각이 이렇게 납니다. 희진이랑 중학교를 가서도 한 반이 되는 행운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해지기 전, 이제 새해 선물을 챙길 땝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한테는 벌써 우편으로 보냈죠.
“그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살펴보는 것,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선물 때문에 고민했더니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하다는 틈틈이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그가 원하는 게 있다고 말하는 걸 잊지 않게 적어두거나 아니면 생각한 걸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셨어요. 주인이 권하는 것도 보고 엄마랑 아빠가 권하는 것도 보고 그런데 무엇보다 네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거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하구요.
읽을 만하셨음 좋겠어요.
참, 저는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던 구절이 참 마음에 들어엇 샀어요. 선생님이 창가에 계실 때 생각이 문득 났거든요. 쓸쓸한 날에 강변으로 나간다던 노래 가사처럼요.”

담임선생님께는 시집을 한 권 선물합니다. 좋은 시가 있으면 아침 자습시간에 한 번씩 일어주곤 하시는 선생님이시거든요. 교무실에 가서 일직 하시는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책상에 놓아드립니다.
“이 돈 보태서 등받이 방석의자 꼭 사셔요.”
할머니껜 돈 봉투를 드립니다. 엄마 아버지한테 같이 선물하자고 말씀드렸지만 벌써 올 선물을 준비했다 하셨거든요.
“엄마랑 같이 준비했어요.”
아버지껜 면도기를 엄마껜 꽃 한 송이를 선물합니다.

이제 희진이 선물만 남았습니다. 하다는 자꾸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혼자서 포장을 한 선물을 가지고 희진이랑 만나기로 한 서점 앞에 섭니다.
아, 저어기 희진이가 오네요!

(1999.2.24. 새벽 5시 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