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 치던 아이 >

옥 영 경


1.
어떤 다른 소리도 스며들어버릴 것 같은 피리 소리, 마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와 신들린 듯 피리 소리를 따라가는 아이들, 피리 불던 사나이는 깊고 깊은 산 속 바위틈으로 걸어 들어가고, 사나이를 괄시하던 마을 사람들의 때늦은 후회와 통곡...
저는 꽤 커서까지 대학로를 걷다가 혹은 신촌 거리를 걷다가, 인사동을 걷다가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피리 비슷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행여 제가 그 소리를 따라 가기라고 할까봐, 그만 밑도 끝도 없는 바위 틈새로 가버리기라도 할까봐 잠시 몸이 뻣뻣해지고는 하였답니다. 마치 재래식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았는 동안 끈적끈적한 손이 그 시커먼 아래에서 올라와 발목을 끄는 상상을, 가랑이 사이로 내려다보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 확인하면서도,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하는 것처럼. 딱히 무시무시한 느낌인 것도 아닌데, 어린 날에 만났던 이야기의 세상이, 또는 어린 날 작은 경험의 세계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커다랗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 가끔씩 소스라쳐지는 겁니다. 물론 뭐 사람마다 차이야 있겠지만 말입니다.

2.
올 여름, 바다 건너라고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저는 학회 참석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몇 나라를 여행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은 참 밝은 도시였습니다. 하기야 스무 시간씩이나 태양 아래 있는 도시이니 것도 그렇겠거니와 일년 내내 북쪽 하늘에서 내리는 투명한 사광(해나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진 빛이란 뜻인지 비스듬한 빛이라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는)탓에 다른 유럽지역과 다를 거라고들 했지요.
남편이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던 시간 저는 옛 시가지 감라스탄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인형들과 유리세공품들, 장신구들, 그리고 그림엽서들을 헤집다 국회의사당 쪽으로 걷던 참이었습니다. 지하의 동굴창고를 써서 만든 레스토랑, 골동품점, 이탈리안 모드의 부티크, 작고 아담한 은행, 갤러리가 줄지은 베스테르뢰그가탄, 그 길 마지막에서 저는 춤을 추는 아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아니, 보았습니다. 열 살 남짓이나 됐을까요. 카세트에서 나오는 음악에 따라 마이클 잭슨을 흉내 내는 아이 앞에는 작은 바구니가 놓여있었지요. 미끄러지듯이 뒤로 가는 그 춤이 끝나면 아이는 또 그 음악을 돌려 역시 그 춤을 또 추고 그러기를 네 차례, 그 동안 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딱히 한갓졌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히 걸어야만 회토리에트 광장 동쪽의, 노벨상 수상식이 이루어지는 콘서트홀도 갈 수 있었고 왕립공원, 세르겔 광장도 남편이랑 약속한 시간이 되기 전에 둘러보려면 아주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제가 그 아이를, 아니 정확하게는 음악이 실린 그 광경을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분명 어덴가에서 그 비슷한 풍경을 만난 적이 있는데, 있는데, 그건 어디였던 걸까요? 무엇보다 그리 별스러울 것도 없는 그 그림을 석연치 않은 느낌으로 자꾸 돌아본 건 왜였던 걸까요?

그런 기분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대국의 자존심 같은 걸까, 핀란드 헬싱키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서 우리 부부는 승무원들로부터 단 한 마디의 영어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낱말을 건네는 우리에게 그네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지요. 다행히 헬싱키에서 일하는,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 부부가 옆 칸에 있었던 덕분에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었기 망정이지...
그것은 모스크바에 지내는 동안도 마찬가지였는데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젊은이 몇을 만난 게 아니고는 호텔직원들조차 영어로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개방되어있다던 붉은 광장은 우리가 가 있는 동안 닫혀있었고 그 까닭조차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겨우 영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면 누구랄 것 없이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안내문 하나 붙어져 있지 않음을 툴툴거리기도 하면, 여기는 러시아다, 하고 당당히(?) 말할 뿐이었지요.
어느 나라 어느 큰 도시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관광할 만한 곳을 안내하는 인포메이션 센터 하나 없는 러시아에서 그나마 레바논으로부터 유학을 와 십년 째 살고 있는 의대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구 알바트 거리’도 몰랐을 겁니다, 우리의 인사동쯤 되는.
역시 남편이 학회 관계로 사람을 만나는 동안 저는 그 거리에서 손으로 만든 장신구들을 구경하거나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소련의 추억거리들을 파는 노점들을 구경하고 다녔고, 더러 작은 공연을 하거나 춤을 추는 이들 사이를 기웃거렸습니다.
그런데 거리 이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를 다 돌고서 전철을 타러 가다가 다시 되짚고 싶은 풍경에 몸을 돌렸더랍니다. 되돌아서 사람들을 헤치고 간 곳은 어린 여자 아이 둘이 마치 어른들 정장 같은 복장을 하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곳. 열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그들 앞에도 물론 바구니가 놓였고, 멀리서 그들의 엄마이거나 아니면 주인인 듯한 아줌마가 그들의 보호자가 아닌 양 등을 지고,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지요.
그래, 그들, 그들의 노래가, 그들의 아코디언소리가 마치 오래 전에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데 물 건너라고 다니기는 이번이 처음인 저로서는 도대체가 모를 일이었습니다. 왜 그 풍경이 낯익은 걸까, 왜 그 풍경이 저를 끌었던 걸까요?
하기야 어데고 사람 사는 곳이고 보면, 사람 사는 양이 매한가지라, 어디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누군가 죽고 할 터. 더구나 결혼을 하고도 수년 동안 기다리는 아이를 얻지 못해 아이에 대한 유다른 사랑이고 보면,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이 굳이 그리 어색할 일도 아니겠다 하고, 고개 두어 차례 갸웃거리다 호텔로 돌아왔지요.
그리고, 여름은,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풋감은 살이 오르고...

3.
며칠 전, 뜬금없이 소식 오래된 외사촌동생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이 드니 형제지간 찾아 챙기게 되더라며 한 전화였지요.
어린 날 우리는 대부분의 방학을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 외가의 다섯 사위들이 다 교수이거나 교사여서 방학이면 외가에 죄다 모여 열흘을 넘게 같이들 보냈고, 그래서 외가가 있는 ‘상동리’는 우리들의 고향이 되기에 충분했다마다요.
바로 그 전화 때문에 한참 만에 ‘상동리’를 도드러지게 생각하게 된 겁니다. 외가 뒤로 제법 높은 산이 자리를 틀고 마을 앞으로는 평야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너른 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우리가 멱을 감으러 몰려가던 시내가 있었습니다, 소처럼 누운 앞산을 끼고.
기억은 꼬리가 길어서 저는 상동리와 읍내를 이어주던 백거이 다리(지금은 다리라고 부를 것도 없이 아주 작은 개울에 가로놓인)를 생각해냈고 그 다리를 지나 역시 가게라고 부를 것도 없는 구멍가게 다음의 ‘그 집’까지!
‘그 집’에는 늘 잎 많은 대나무 한 가지가 대문 귀퉁이에 세워져있었고 그 대문 앞에는 또 그 대나무 같은 풍경으로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늘 대문 삽짝(잡목가지로 엮어 만든 문짝이 달린 것도 아니었지만 돌담 사이 집을 드나들던 그곳을 상동리에서는 그렇게 불렀습니다)에 퍼질러 앉아 양은 대야 두 개를 엎어놓고 막대기로, 더러는 손으로 두들기던.
그 아이의 아버지는 박수였습니다. 징을 들고 혹은 대나무를 들고 혼을 부르거나 귀신을 내쫓고, 도둑의 길을 밝혀내거나 도망자의 길을 추적하고, 바램을 기원하고 이루게도 하던. 시절은 그랬습니다. 박정희의 근대화가 물결치면서 마을마다 당산나무며 서낭당이며가 다 뿌리 뽑히고 지붕이 개량되던 그 시절, 특히 학교는 그 근대화의 선봉장이 되어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며 우리가 지닌 아름다운 전통들을 비과학의 이름으로 박대했습니다. 어쩌다 무당이며 박수들이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인 아이들은 근대의 세례에 눌려 결코 부모의 직업을 말하지 않았지만 좁은 동네에서 아이들은 서로네의 밥숟가락 수를 이미 다 알고 있었지요.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자식들을 키울 준비를 하는 동안 저는 잠시 상동리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녀, 덕분에 그곳에 더러 아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예닐곱 남짓으로만 그려지는 북을 쳤던, 그가 아버지한테 본대로 들은 대로,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하지 말라 야단을 맞기도 한 듯합니다, 그 아이, 아침이고 저녁이고 삽짝에서 북을 치며 징을 치며 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가락이 어찌나 꼴이 그럴 듯했던지 그 앞을 지날라치면 제법 흥이 돋워지기도 했더랬지요.
그런데 ‘근대화’가 절정이던 그 해, 저는 아이들이 그 아이에게 손가락질하고 놀리는 걸 보기도 했고 저 역시 놀리는 축은 아니어도 비과학의 그를 저으기 경멸하기도 했던 듯합니다.
어머니가 작은 도시에 자리를 잡고 우리 형제들을 모아 한 집에서 키우게 됐던 여름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는 선생님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상동리에서 물장구를 쳤습니다. 그 때 그 아이가 사라진 얘기를 들었던 겁니다. 아이들이 놀려서 북을 더는 치지 않던 그 아이가 시름시름 누웠다가 어느 날 삽짝을 걸어 나갔다는데 도대체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사라진 날 아랫동네 윗동네에서 일곱의 아이가 같이 사라졌다는데, 경찰에서 조사를 나오고 난리가 아니었다는데...
홀로 남아 계시던 외할머니 세상을 떠나고 상동리가 더는 우리들의 고향이 아닐 때까지도 그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간간이 상동리에 남은 이들과 소식을 주고받을 때도 사라진 그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요.
그때도 피리 부는 사나이를 생각했던 듯합니다, 지금처럼. 그 아이가 북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 북소리를 아이들이 따라갔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동리 뒤 계룡산 시커먼 자갈밭 속으로 들어갔을 거다...
개구리 잡으러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았던 소년 다섯의 실종 사건이 오래 뉴스에 오르내릴 때도 저는 같은 상상을 했습니다, 원한이 쌓인 한 사람의 장구 소리를 따라 그들이 갔을지도 모른다는.
우리 사회에서 무데기로 아이가 없어졌다는, 도저히 그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제게는 어김없이 사회가 벼랑으로 밀어낸 어떤 이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따라갔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이어졌답니다.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홀대 당한다는 기사를 접할 때도 그들은 어떤 악기를 다루는 걸까 그려보기도 했지요. 어느 날 그네가 피리 부는 사나이로 변하는 건 아닐까...
그래, 오늘, 우리 사회가 무시한 사나이가, 우리가 버렸던 여인네가, 후미진 골목 어디메서 피리를 불며 우리 아이들을 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