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할머니의 명당 - 1 >

옥 영 경


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났습니다. 애들은 언제 갔는지 다 나갔네요. 또 혼자입니다. 학교에서 내가 잘 어울리는 아이들은 새 동네 아이들인데다가 우리 동네 아이들은 가방을 빨리 싸기 때문이지요.
새 동네 아이들은 공부를 잘 합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거나 다른 좋은 직업을 가진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는 전부 농사를 짓고 이상하게 공부들도 잘 못합니다.
얼마 전 동네에 아스팔트가 깔렸습니다. 우리 집까지는 아니구요. 큰 병원이 하나 생겼는데 거기까지만 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 집까지 한 백 걸음쯤 되는데, 비가 많이 온 날이 아니면 그런 대로 재밌는 일도 많습니다, 거인놀이 같은 거. 나는 큰 바다 위를 걸어가는 거인이 됩니다. 흙 사이 박힌 돌은 섬인 셈이지요. 그 섬만 척척 밟으면 바다에 빠질 염려가 없습니다. 어쩌다 다른 섬이 너무 멀어 오도가도 못하다면 에잇, 그만 시시해져버려 그 놀이도 끝입니다.
아스팔트를 너머 ‘오비 할매집’ 앞을 지나가는데 자리공이 보입니다. 열매를 한 송이 따서 하나씩 터뜨리며 거무죽죽한 물을 흘리고 가는 것도 그만 시시해져 손가락으로 혼자 그림을 그리며 집으로 걸어갑니다.
“아이구, 골집 진숙이는 저렇게 다니면서도 공부를 한다!”
째보 할매입니다. 언챙이인 할머니를 애고 어른이고 그렇게 부르지요. 초저녁에 한숨 자고 잠이 안 온다며 가끔 우리 집에 한 밤에 놀러오는 재미로 사신다는 할머니.
아무 그림이나 그려대던 손가락은 이제 정말 수학 공부를 하는 손으로 바뀝니다.

“왜 이리 늦노? 넘들은 다 와서 콩도 뚜드리고 하더만...”
‘또 시작이다.’
돌담을 돌자마자 마당에 널린 것들을 걷던 할머니의 야단에 들어도 못 가고 발 밑에 있는 주름잎만 쳐다보았습니다.
“내가 왜 아들이랑 못사는 지 아나? 다 니 때문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는지 아나, 친손주는 버리고 외손주만 싸고 돈다고, 나중에 무슨 좋은 덕 볼라고 저러나 한다.”
또 외삼촌이랑 싸웠나봅니다. 외삼촌이 어쩌다 외가에 들리면 할머니는 꼭 싸우고 맙니다. 막내 이모가 그랬는데, 그건 다 넷이나 되는 딸들 제대로 못 먹이고 아들 키워놨더니 자기 마누라만 좋아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밥 먹고 저 너머 고구마 밭으로 온나.”
우리 집(사실은 외가지요)은 산길로 이어지는 골목 끝이라서 사람들은 골집이라 부릅니다. 정말 고요하지요.
마루에 걸터앉습니다. 담 밑에 까마중 익은 게 보입니다. 잘 익은 까마중 열매는 참 답니다. 오디에 견줄 건 못되지만 열 포기에 달린 걸 다 따먹어도 성에 차질 않습니다.
집 뒤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우리 집 네 그루 감나무 가운데 가장 큰 납딱 감나무는 홍시를 날마다 따먹어도 꼭 그만큼 또 걸려 있습니다.
“어이, 캔디!”
동네 오빠들이 그렇게 부를 때 나는 참 좋습니다. 나무 잘 타는, 만화 속에 나오는 씩씩한 캔디 말입니다. 납딱 감나무 제일 높은 가지 끝에 있는 홍시를 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요.
감 하나 따먹고 방에 들어갑니다. 명당부터 눈이 갑니다. 명당은 빨간 천이 내려진 조그만 벽장 같은 곳입니다. 할머니는 거기다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불교 신자라는 할머니는 칠성신도 떠받들고 있지요.
“신도 여러 신이 있지. 그 신들 중에서 힘이 센 신, 덜 센 신이 있고, 두루두루 잘 모셔야 편한 거라.“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신기(신의 기운)가 있어 신내림을 받았다는데 그걸 할머니가 물려받으셨다 합니다. 몸이 많이 아프고 난 뒤에 할머니한테도 신기가 생긴 거라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그 힘-신기 말입니다-으로 잃어버린 소나 반지, 사람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장사를 시작하면서도, 집안에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도 찾아오면 할머니는 무당처럼 징을 치며 대나무를 잡고 굿을 하거나, 아니면 한 밤중에 고사를 지내러 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명당을 찾을 때는 꼭 초를 사왔습니다. 집을 찾아온 이들은 명당에 곱게 밝힌 촛불을 보며 “촛불이 차암 얌잖네.”하며 좋아하기도 하고, 바람 없이도 촛불이 파닥거리면 괜스레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명당에는 절을 하고 가면서 사람들이 둔 사탕봉지가 꼭 있습니다. 할머니 몰래 사탕 한 알이 빠져 나올 구멍으로 벌써 여러 개 꺼내먹었습니다. 하나만 딱 더 먹고 말아야겠습니다.
‘칠성신님, 부처님,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
꺼림칙해서 얼른 절을 하고 나왔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비과학적이야. 그러니까 근대화가 늦어져서 선진국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거라구. 새마을 운동 같은 거 있었으니 서낭당이니 그런 거 다 없애고 지붕개량도 하고 농촌이 이만큼 살 게 된 거지.”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 정말 죽을 맛입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과학을 믿어야 할 게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면 부끄러워 죽겠습니다.
“진숙아, 너거 할머니 무당이라면서?”
“......”
그런데, 할머니가 찾아낸 그 많은 소와 그 많은 반지는 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할머니를 찾아온 뒤 장사가 잘 된다는 집들,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숱했던 집들은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아주 귀해서 그만큼 비싸다는 우리 집 뒷담 오리 감나무를 한 밤에 훔치러 온 도둑을 할머니가 저녁밥상 앞에서 미리 말씀하신 것도 정말 우연일까요? 정말 그랬다니까요, 밥을 먹던 할머니가 열어 젖힌 뒷문 너머 어둠 속을 보며 아무래도 오리 감나무가 성치 않겠다고, 오늘 밤에 무슨 일이 나지 싶다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심으셨다는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골목 옆 작은 언덕배기를 지나면 팍팍한 밭뙈기 하나 나옵니다. 옥수수 심은 가장자리부터 웬만한 야채를 두루 볼 수 있는 갖가지 밭이지요. 그 밭가를 지나다보면 이렇게 때늦은 산딸기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탑스럽다는 말을 잎 새 뒤 숨은 산딸기를 들치며 배웠던 듯합니다.
벌개미취가 맘껏 폈습니다. 참말 곱습니다.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돈벌러 도시로 간 우리 엄마! 눈 돌리면 저긴 또 쑥부쟁이 천지고...
괜히 왕고들빼기며 쇠무릎을 툭툭 치며 갑니다.
“어서 안 오고!”
할머니 고함소립니다. 한 쪽에서 오줌을 누고 일어서신 모양입니다.
고구마순은 내내 좋은 반찬입니다. 껍질을 벗기는 것도 그리 지루하지 않고, 데쳐 무치는 것도, 볶는 것도, 된장을 넣고 끓이는 것도, 다 맛납니다, 풋마늘처럼. 어머니는 할머니처럼 고구마순 김치를 잘 담았는데...
어제는 할머니가 고구마순을 무청처럼 엮었습니다. 그걸 말려 놓으면 겨울 내내 좋은 먹거리가 되거든요.
종규네 아줌마가 와서 고구마를 벌써 절반도 더 캐놓고 가셨습니다. 아줌마는 할매 혼자 고생한다며 일손을 많이 봐주십니다.
하기야 그 뿐이 아니지요. 며칠 전엔, 마당 한가운데 빨랫줄 말고 뒤란 빨랫줄에 널려있는 이불을 보고, 또 참견을 하고 갔습니다.
“아이구, 진숙이 또 오줌 싼 모양이네. 할매가 보통 일이 아니겠다.”
야뇨증이라고 하는 거, 그것도 병이라던데, 무식한 종규 아줌마 그것도 모르면서, 마음이 힘들어서 그러는 거라던데, 나는 한여름 밤엔 일부러 수박도 안 먹고 자는데, 밤에 물마시고 싶어도 얼마나 참고 자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깊숙이 파야지. 살살.”
그만 호미에 고구마가 다쳐서 나오는데, 할머니가 마침 그걸 보셨습니다.
“사람이 자고로 본때가 있어야 되는 법이다. 본 게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는 거라.”
어째 일하는 게 그 모양이냐며 먼저 잘 보라십니다. 할머니는 차례음식을 준비하실 때도 꼭 곁으로 부르십니다. 치자를 까서 물에 불려놓는 것부터 웬만한 잔일은 다해야 합니다. 그냥 썰어서 지지면 되는 두부부침조차도 꼭 보게 하십니다. 뒤집어놓은 부침개용 솥뚜껑 아래 일고 있는 불꽃이 더 궁금해 내 눈은 자꾸 거기로만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