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오빠와 구름 한 조각>

옥 영 경


"보증금 없이는 방 안 준다."
허름한 동네에서 가장 싼 방이라도 얻으려면 보증금이란 게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복덕방 아저씨는 그래도 주인한테 잘 말하면 될 거라고 해서 산동네 맨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가봤지만 헛일이었지요.
"오빠, 그럼 우리 아직도 같이 못살아?"
막내가 물었지만 작은오빠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큰 오빠한테 가보자."
"담에 가자."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돈벌러 떠나면서 큰 오빠는 작은 집에, 작은 오빠는 큰집에, 막내는 외가에 맡겨졌습니다. 엄마는 가끔 옷가지랑 학용품 같은 것을 보내왔지만 어디에 사는지 언제 올 건지 아직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오빠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서였지요. 큰 오빠랑 작은 오빠랑 막내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돈 벌 거다, 우리도 방 구하자."
"그래, 나도 밥 할 수 있다."
작은오빠가 같이 살자고 해서 막내는 신이 났습니다.
"형은 계속 공부해. 내가 돈 벌어서 살림할게. 형이 학교 끝나고 버는 돈은 형이 다 쓰면 돼. 대신 생활비는 내가 버는 거야."
자꾸 작은 오빠만 말을 했습니다. 언제나 작은 오빠만 말을 많이 합니다. 큰 오빠는 엄마랑 아빠랑 없는 것이 막내보다도 더 슬픈지 통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작은 오빠는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학교도 안가고 싶지만 큰 엄마가 어려워도 중학교는 마치라고 했기 때문에 다닙니다.
그릇을 찾으면서 그날 수금을 끝내면 작은 오빠 일은 끝이 납니다. 배달 가서 받은 돈은 꽤 큰돈이라 오빠는 늘 조심해서 다닙니다.
하루는 수금을 다하고 가게에 들어갔더니 아줌마가 막 뛰쳐나왔습니다.
"야, 김군아, 아저씨가 많이 다쳤단다."
새로 짓는 아파트에 배달을 가셨다가 엘리베이터 같은 게 고장이 나 아저씨를 내리눌렀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며칠을 앓았고, 아줌마는 가게도 보고 아저씨도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방을 구했습니다. 친척들이 말리기도 했지만 다들 가난해서 누구 하나 책임지고 돌보아줄 수 없었습니다.
"어린 것들이 같이 살고 싶다니까..."
"가끔 들여다 봐주마."
"그래, 그래도 고아원 안가는 게 어디냐?"
"그래도 네가 일해서 방을 다 구하고... 열심히 살다보면 하늘도 무심치 않을 거다, 엄마도 돌아오실 거고."
보증금을 마련한 작은 오빠를 모두 칭찬했습니다.
작은오빠는 생각합니다.
‘나중에 돈벌어서 갚으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주인아저씨랑 눈이 오래 마주치면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저씨가 다쳤던 날, 어느 누구도 작은오빠가 수금한 돈을 챙기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형, 이거..."
작은 오빠는 보증금 내고 남은 거라고 큰오빠에게 용돈도 주었습니다. 그래도 큰 오빠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형이 벌어서 써도 늘 모자라지? 내가 얼른 더 많이 벌어야 하는데..."
막내도 오랜만에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작은 오빠가 붕어빵도 사주고 오방떡도 사주었습니다. 맨날 맨날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들인데, 하늘만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열 개도 못 먹어 배가 불렀습니다.

작은 오빠가 늦잠을 자서 급하게 세수하러 가다가 문지방에 걸렸습니다.
'그 돈을 훔쳐서 그런가봐...'
작은 오빠는 배가 아플 때도 머리에 열이 날 때도 돌에 걸려 넘어질 때도 비를 맞은 날에도 모두가 그 돈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았습니다.
'부지런히 벌어서 꼭 갚아야지.'
오빠는 맘을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날이 흐렸습니다. 작은 오빠도 쉬는 날입니다. 큰 오빠도 학교에서 일찍 왔다가 저녁에야 일을 나가는 수요일입니다.
막내도 놀이터에 가지 않고 방에 있습니다.
"이런 날 엄마는 부침개 해줬는데..."
"호떡도 먹었는데..."
막내만 혼자서 얘기를 합니다. 큰 오빠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오빠까지 말을 안할 건 뭐람.'
작은 오빠가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수제비 해먹자."
"오빠, 나도 뜯어 넣을게."
작은 오빠가 반죽을 합니다.
"너는 뭐 만들고 싶어?"
수제비를 끓일 땐 모두 같이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모양을 뜯어 넣어서 먹을 때 찾아가며 먹습니다.
"큰 오빠도 해."
"안돼. 형! 형은 공부해, 우리가 해서 줄게."
큰 오빠는 또 아무 말 안합니다.
작은 오빠랑 막내는 수제비를 뜯습니다. 처음엔 숟가락 크기만 하게 뜯다가 차츰 커집니다. 꽃이며 비행기며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다가 먹고 싶은 것들을 만듭니다.
"이건 피자야."
"이건 만두다."
"이건 호떡이야."
"이건 돈까스."
작은 오빠는 막내가 만드는 것들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아무한테도 훔친 얘길 안했습니다. 큰 오빠한테는 더더욱 안했습니다. 그러면 당장 다시 우리가 살던 곳들로 뿔뿔이 흩어지자고 하거나, 자기가 당장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거나, 뭐 그럴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그래, 니가 고생 좀 해라. 하나라도 졸업을 하면 좀 낫겠지. 친척들이 나만큼은 좀 도와줄 수 있다니가, 얼른 졸업해서 너 검정고시라도 치게 해 줄게. 그래도 막내가 아직 학교를 안 다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놓고 내내 울 때처럼 또 꺼이꺼이 울지도 모릅니다.

막내는 신이 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은 죄다 끌어댑니다.
여자 애라 그런지 예쁜 옷들도 만들어 넣습니다.
'꼭 갚아야지, 주인아저씨한테 못 갚으면 이 세상 누구에게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힘이 되는 걸로 갚아야지.’
작은 오빠는 도둑놈이 된 자기가 자꾸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만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괜히 남은 부스러기들을 만지작거리다 반죽을 마저 합니다.
작은 창문으로 하늘이 보입니다. 높은 데 사니 이런 건 좋습니다.
‘복덕방 아저씨가 아랫동네 지하 셋방보다 더 나을 거라고 그러더니...’
뭉게구름이 아주 큽니다. 아주 아주 큽니다.

그때, 바로 그때! 뭉게구름 한 조각이 반죽에 말려들어 갔습니다.
"어!"
한 그릇씩 떠먹던 수제비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네."
큰 오빠가 말을 다 했습니다.
또 한 그릇씩 먹어도 그대로였지요.
"이야!"
막내는 신이 났습니다.
"오빠, 나 종수 불러올게. 준호도, 성광이도, 종환이도 데려오고..."
아이들이 모여 다 먹고도 수제비는 또 남았습니다.
"정희 할머니도, 희주네 할아버지도..."
저녁이 되었습니다.
일 나갔던 동네 아저씨들도 아줌마들도 다 모여 한 그릇씩 먹었습니다. 여기 이사 와서 짐도 옮겨주고 김치도 한 보시기 주던 이웃들에게 처음 뭔가를 줄 수 있었습니다.
수제비는 한살바기 하다 앞에 놓인 작은 그릇까지 채워주고서야 동이 났습니다. 참, 중국집 아저씨네도 두 그릇 갖다 주었지요.

가끔씩 작은오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바램을 간절하게 담아 구름을 보면 구름이 한 조각 그렇게 들어와 앉았지요...

(1998.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