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과 달 >
-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부쳐

옥 영 경


바람 좋은 날 햇살아래 미루나무 이파리 마냥 눈부신 어린 날이 누구에겐들 없었을까요. 그러면서도 어느 기억의 한 자락은 꿈속에서 뱀이 아궁이로 끌어당기던 악몽 같은 절망 또한 갖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요.

어릴 때 우리 동네에는 만경평야-어린 저에게 그리 보였다는 말이지요-같은 들을 지나 그리 좁지 않은 내가 흐르고 그 너머로 산이 누운 황소처럼 길게 뻗어있었습니다. 큰길에서 우리 집으로 오르던 좁은 길 한 편은 듬성듬성 세 채의 집이 전부였고 다른 편으로는 굵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선 낮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길옆으로 작은 도랑이 흐르고, 집과 집 사이로 논 한 뼘과 밭 한 뙈기가 있었으며, 우리 앞마당 옆에는 오래 묵혀져서 놀이터가 된 널찍한 땅도 있었지요. 여느 시골처럼 숱하게 꽃들이 지고 피고 새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땅도 없고 넘들처럼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던, 원양어선을 타러 떠났습니다. 반년이나 일년마다 아버지를 볼 수 있었는데도 그게 그리 아쉽지 않았던 걸 보면 누나들과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로-사람들뿐만 아니라-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저는 그림을 곧잘 그렸습니다. 꼭두서니도 그리고 하늘타리도 그리고 호박꽃도 그리고 소태나무도 그리고 담도 그리고 닭과 개와 소도 그렸습니다. 아버지도 그리고 어머니도 그리고 반딧불도 그리고...
한 봄날, 누나들이 학교 갔을 때 혼자 도랑에서 놀다가 올챙이에게서 재밌는 얘기를 들었지요. 마루에 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주 아주 커다랗게 그렸습니다.
“또 뭐 그렸노?”
누나들이 돌아와서 물었겠지요. 글쎄요, 그 시절, 농사도 짓지 않았던 엄마는 뭘 하러 날마다의 풍경에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는 아주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고래!”
“고래?”
“어.”
“엄머, 무슨 고래? 올챙이네.”
“고래다!”
그러면서 올챙이한테 들은 얘기를 들려줬지요. 언젠가 자기는 바다로 갈 거라고, 올챙이배가 그렇게 불룩한 것은 고래를 닮아서라고, 뒷다리가 나오기 전에 바다로 갈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자기는 고래로 자랄 거라고.
“또, 또, 저 엉뚱한 생각...”
“아니다, 진짜라니까. 그래서, 그 왜, 비가 억수로 많이 오면 물이 넘치잖아. 그러면 그 때 바다까지 흘러간 애들이 고래가 된다더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또 한다. 그러면 원래부터 바다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바보, 우리도 서울에서 태어나고 이런 시골에서 태어나고 그래도 다 사람이다 아이가. 다 같은 고래지, 뭐.”
“숙경아, 안되겠다, 어서 숙제나 하자.”
“어, 언니.”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은 작은 누나를 큰 누나는 데리고 들어가버렸습니다. 눈이 부셨던 제 어린 날에 때때로 그렇게 절망이 끼어들었던 겁니다. 얘기 안 해도 알겠지만 물론 어떤 어른도 그걸 고래라고 믿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요.
그나마 윗집 살던 경아 누나가 위로가 되기는 했습니다. 제 그림을 보여주면 누나는 그랬거든요.
“그렇구나...”
제 그림을 이해했던지 못했던지, 그만 열 살이나 많던 경아 누나는 제 첫사랑이 되었던 겁니다. 그 누나마저 서울로 떠나고, 저는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요.

나이는 세월을 비껴가지 못하고 제게도 차곡차곡 낙엽처럼 쌓여갔습니다. 그때 올챙이가 꾸었던 고래의 꿈을 아주 가끔 꿈에서 만날 때마다 저는 배를 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마음 같던가요. 저 역시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올챙이의 고래 이야기도 잊혀져가고...
그러다 어느 날 저는 여기 미국 시카고로 왔습니다. 시카고로 발령을 받은 걸 환영한 것도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어린 날 만났던 올챙이가 생각났던 겁니다. 그 올챙이가 꿈을 이뤄 이 호수에 살지도 모르잖아요. 물론 요새는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 이런 말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세상의 믿음과는 다른 일들이 이 우주 안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를 저는 어린 날의 추억으로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이 호수에 고래가 없다고 누군들 자신의 생을 걸고 장담할 수가 있냔 말입니다.
“화창한 봄날에 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때에...”
그래요, 그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고래를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지요. 결국 비행기를 타고 올 수 밖에 없었지만.
와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안한 것도 아니지만 막상 오니까 말도 잘 안되고 날마다 처리할 일도 많고...

새 해 하고도 4월이 되었습니다. 한 날은 눈 한 바탕 내리더니 열흘도 지나지 않아 한여름 날씨가 되더군요. 반갑다고 여름 옷 꺼내 입고 나갔다가 감기만 얻었습니다. 다시 초겨울 날씨로 바뀐 거지요. 시카고 날씨가 워낙에 그렇답니다. 며칠 앓은 뒤 내일은 출근을 해도 되겠다 하는데, 잊었던 호수가 생각났습니다. 날마다 출근길에 오가며 호수를 보기는 했어도 아직 호숫가로 나가보지는 못했거든요.
달빛 참 좋습니다. 늦은 시간이고 아직 날도 차니 사람 기척이 있을 리 만무지요. 무서우리 만치 고요했습니다. 말이 호수지, 이건 숫제 바다입니다. 그러니 여기 사람들도 호숫가라 부르지 않고 바닷가라 부를 밖에요.
작은 나뭇가지가 하나 보였습니다. 주워서 모래 위에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올챙이요, 그 고래 말입니다.
“야, 고래다!”
치, 어느 바보가 올챙이를 보고 고래라 그래, 나 같은 바보가 또 있었네 싶어 쳐다봤더니 목소리만 꼬마가 아니라 정말 소년 하나가 제 눈앞에 서 있는 겁니다. 그 깊은 밤에.

소년은 깊디깊은 산골에 살았다 했습니다. 마치 인적이라고는 있어 본적이 없는 그런 깊은 곳에. 그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산꼭대기의 도저히 몇 해를 살았는지 헤아릴 수가 없는 고목나무도 그의 것이었고, 그 산에 사는 메아리도, 그 산을 찾은 딱따구리도, 너무도 맑아서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마시고 가는 샘도 그의 것이었지요. 모다 모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달 때문이었지요. 토끼가 절구질하는 초승달에서 서쪽 나라로 가는 배 같은 반달이었다가 기쁨 덩어리 보름달이더니 다시 반달이 되고 초승달이 되는, 그 달이 갖고 싶었습니다. 잃어버렸다싶으면 다시 새살처럼 돋는 그 달이 그는 너무나 가지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달을 따러 가기로 결심했지요.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소년기가 누구에게나 있듯이. 크고 큰 망태를 메고 길고 긴 장대를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며칠 따 모은 열매들을 차곡차곡 쟁여서.
소년은 하루종일 걸었습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렸고, 그는 너른 바위에서 쉬었습니다. 마침 달맞이꽃이 그 곁에 피어 있었구요.
“나는 저 달을 사랑해.”
꽃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달을 볼 때마다 꽃을 피운다 하였습니다. 한껏 피운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소년은 또 종일을 걸었습니다. 그는 읍내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홀로 있는 집에 닿았습니다. 읍내 떡집에다 나무를 팔러 가는 남자가 그 집에 살고 있었죠.
“나는 나무를 갖다 주는 날을 잘 알아야 해.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달이 얼마나 찾는지 혹은 기울었는지를 보면 때를 알 수가 있거든.”
또 한 사람이 달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소년은 알았습니다.
사흗날도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아주 아주 아주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해가 지고 달이 솟았지요. 그는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달을 향해서 바램을 빌고 있는. 간절히 간절히 빌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보름달이 소년 바로 위에 있었지요. 그는 달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는 달은 너무나 빛났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겠지요.
장대를 집었습니다. 장대가 닿자 금새라도 달은 대롱대롱 떨어질 참이었습니다. 그때, 다른 때도 아닌 바로 그때, 그가 만난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사랑한 달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년은 산을 내려왔지요. 달을 따지 않았지만 행복하지 않을 건 없었습니다. 달을 갖지 않았지만 언제나 달을 볼 수 있으니까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달빛이 닿는 곳이면 소년은 어디든 간다고 했습니다. 달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고 쉰다고 했습니다.
“또 언제 여길 오니?”
그러나 그는 이미, 동화에서처럼, 떠나고 없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소년 주고 간 달빛-맞지요. 그가 딸 수 있었으나 남겨둔 달이니-속에서 모래 위를 거닐었습니다.
마치 제 고래가, 그 올챙이 말입니다, 저 멀리 호수 한가운데서 솟구쳐 오른 걸 본 것도 같았지요.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