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 줍는 아이 >

옥 영 경


마당에서 눈을 들면 앞도 산이고 뒤도 산인 쫑아네 집은 산골입니다.
집 뒤 오솔길을 따라 산 쪽으로 제법 오르면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한 구석으로 거짓말처럼 작은 저수지가 있습니다. 깊어지던 겨울이 다시 엷어질 즈음 저수지 가장자리로 버들강아지 툭툭 불거져 나오면 아, 봄이 바로 예서 시작 되는구나 깨닫는 저수지입니다. 이즈음 그곳은 꽝꽝 얼어서 빠질 염려 없이 죙일 얼음을 지치며 놀 수 있는데 쫑아는 다른 일에 한창 빠져있습니다.
“니까짓 게 바쁠 게 무에 있어?”
“저도 일하지요,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래요, 쫑아는 어른들 사이로 참견하고 다니느라, 아주 심심하면 동네 할머니들 안부를 물으러 다니느라, 가끔은 심부름을 하느라 그처럼 바쁜 사람이 없다니까요.
날마다 바쁘다는 쫑아가 더 바쁜 일이 정말 생겼습니다. 은행 때문이지요. 가서 저금하고 돈 찾는 그 은행말구요, 나무에 달리는 은행요.
그런데, 잎도 다 떨구고 별 볼일 없을 이 겨울에도 왜 쫑아는 무지 바빠진 걸까요?

쫑아네 집 둘레에는 은행나무가 아홉 그루나 있습니다. 열매를 내는 것만 해도 여섯 그루입니다. 쫑아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있던 것들이지요.
감나무처럼 타고 오르기에는 불편하지만 쫑아는 은행나무를 좋아합니다. 갈 봄 여름 겨울 없이 다 좋아합니다. 새 혓바닥마냥 내미는 새순에서부터 무성해지는 잎사귀, 그 샛노랗게 빛나는 단풍든 가을잎, 그리고 잎을 다 내려놓고 눈을 맞는 것까지.
은행나무가 다음 계절로 넘어갈 땐 꼭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계절과 계절사이 비가 든다는 것도 은행나무를 보며 쫑아는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신나기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가을의 은행나무입니다. 눈이 부신 은행나무 말입니다. 지난 가을에는 엄마랑 느티나무 튜울립나무 잎들과 함게 은행잎들도 주워서 책갈피에 끼웠습니다. 사전이나 책방에 있는 굵은 책들을 그 위에 놓고 며칠을 두었다가 꺼냈지요. 제법 마르고 다림질도 잘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겨울 준비하신다고 방문에 창호지를 바를 때 쫑아도 한 몫 거들었지요. 먼저 있던 낡은 창호지를 뜯어내고 문살에 낀 먼지를 털 때 못쓰게 된 칫솔을 가져와 쫑아도 열심히 털었습니다.
“외할아버지도 겨울 들기 전에 이렇게 나뭇잎을 넣어 창호지를 바르셨더란다.”
손잡이부분은 구멍이 잘 난다고 창호지를 덧바르시며 나뭇잎들을 끼워 넣었습니다. 엄마는 쫑아에게 어떤 모양새로 하면 좋을까 물으셨지요. 그러니까 햇살 마루까지 들 때 빛이 창호지를 가로지르며 보여주는 나뭇잎 풍경은 쫑아가 꾸민 것입니다. 방안에서 문을 보노라면 창호지에 낀 나뭇잎들이 고스란히 비칩니다. 이 겨울에도 가을입니다. 가을 그 황금빛들이 문살에 얽혀있습니다.
짙은 초록색 여름 은행잎은 쫑아의 스케치북에 붙어 있습니다. 곤충이며 동물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것들입니다. 이 겨울에도 그것은 여름입니다.
가을 내내 쫑아는 다른 곳보다 은행나무 아래 젤 오래 있었습니다.
“어휴, 냄새!”
지나며 은행알을 밟기라도 하면 신발에 묻은 냄새가 오래갔지요. 똥 냄새 같거든요. 은행나무 아래로 지나지 않더라도 거기 은행이 있구나, 공기에 실려 오는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은행을 주워 그걸 비벼 겉껍질을 까고 있으면 꼭 똥냄새만 나는 게 아니예요.
“엄마, 이제 요구르트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