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학교 물꼬의 어제 그리고 오늘

조회 수 10139 추천 수 0 2003.12.17 00:39:00
l 이 글은 자유학교 물꼬(www.freeschool.or.kr)가 2004년 4월 21일(음력 삼월 삼짇날) 상설학교로 문 여는 날을 앞두고 지난 시간들을 가볍게 돌아본 글쯤 되겠습니다. 그간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글로 담을 수 있을 것인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 않는 그 무수한 질감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넘들은 잘도 합디다만. 혹 관심이 있다면 차라리 작업복 들고 이곳 대해리로 걸음 한 번 하시는 게 이 글을 읽는 것보다 낫지 싶네요.

l 이 글을 쓴 직후 ‘물꼬생태공동체’에서는 2004년 문을 여는 ‘자유학교 물꼬’에서 배움값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무상교육말입니다.



내게 요구되는 삶이 무엇이냐 묻는

옥 영 경

물꼬는 아이들 숨통이 되고 싶습니다.
물꼬는 세상의 숨통이 되고 싶습니다.
물꼬는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물꼬는 층이 지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1. 풍경

가을이 어데고 눈부시지 않을라구요. 해발 400미터가 넘는 이 산골에도 노시인의 절창 처럼 초록이 지쳐 지쳐 단풍 넘칩니다.
요새 뭣하며 사냐 물으시면 가을 하늘을 분양해주고 산다지요. 당신이 보신 그 눈부신 하늘도 혹 이곳 대해리에서 나눠준 하늘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새들이 깨워주는 가을 아침은 마치 쨍 소리가 날 것 같은 겨울 하늘 같은 기분입니다. 몇 해 표고버섯을 키우다 진이 빠진 나무로 군불을 땐 방은 곤한 몸을 풀기에 전혀 모자라지 않지요. 불을 때고 앉아있으면 깊은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왜 절간에서 상좌에게 그 일을 시키는지 그만 다 이해할 듯하답니다. 요가와 명상으로 여는 아침, 오늘은 아이들과 또 어떤 하루가 벌어질지, 마을에선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참 궁금합니다.
두터운 가을 햇살이 아까워 이것저것 내다 널고 읍내 나가는 아침길, 계단논의 늦은 벼를 혼자 베고 있는 의준네를 보고 좇아 내려가 한 판 일손을 돕습니다. 피아노를 치다가 텃밭에 있던 고춧대를 죄다 뽑을 즈음 앞집 할머니가 청국장을 내옵니다. 지난 번 드린 콩나물국밥의 답례입니다. 호도 따는 일손을 반나절 보태러 갔다가 서둘러 돌아와 오후엔 가까운 마을 아이들이 오는 공부방에서 함께 공부하고 저녁답엔 달빛이 못내 아까워 학교 울타리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낮게 노래를 부릅니다. 어느 낮엔 중풍으로 드러누운 어른들과 밥상을 함께 하고 어느 저녁은 동네 어른 몇과 전통무예도 하고 민요도 부르지요. 거기 늘 함께 있는 여섯 살 아이는 자기의 존재를 굳이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는 실재하므로. 공동체는 무너져도 교육은 남더라는 말이 과장은 아닌 게 맞겠더이다.
자주 드나드는 품앗이일꾼(자원봉사자)까지 예닐곱이서, 셋이 누우면 꽉 차는 방 둘에서 아이랑 삐댑니다. 화장실은 푸세식에, 밤길은 달빛 별빛을 등불 삼고… 이 원시적인 듯 보이는 삶을 혹 야만이라 이르시겠습니까. 정녕 무엇이 야만인가요? 다른 존재가 쓸 것들을 제가 다 쓰려 드는 삶, 그것이야말로 야만이 아니더이까. 월급도 없이 용돈 십만원으로도 얼마나 충만한 삶이 가능한 지 여기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의 삶은 곪을대로 곪은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고 나아가 자긍심을 일깨워준 시간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다듬어가며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를 배우고 익힌 귀한 장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뭘 더 바란답니까, 비로소 예 와서야 사람같이 살고 있구나 싶습니다.

2. 들어가며

지난 7월 러시아에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모스코바의 낡은 호텔에서 사업차 온 한국인 아저씨들을 몇 만났지요.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난감하지요.
"음… 작은 학교에서 일해요."
그러면 묻습니다. 초등이냐 중등이냐 하는.
"초등이긴 한데, 좀 다른..."
"아, 대안학교요!"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지요. 아, 십년도 더 전에는 저희 학교를 오래 설명해야 하거나 굳이 그럴 필요가 아니라면 '그런 곳이 있어요' 하고 적당히 말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것도 유행처럼 대안학교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불행히도 우리는 대안학교라고 불리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또 대안학교이고 마는. 저희는 다만 우리 이름 그대로 ‘자유학교 물꼬’로 불리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물꼬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 영동에 있다는..."
한국의 짧은 대안교육역사에서 이제는 고전이 된 이름들이 있습니다. 꼽기에 많아서 점점점(…)으로 늘여놓더라도 자유학교 물꼬가 그 안에 있다는 걸 적어도 대안교육에 관심있는 이라면 모를리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이미 그 역사만도 물꼬의 시작인 1989년으로부터 열 네 해가 흘렀습니다. 준비 작업 기간을 빼고 실제 모임체를 꾸린 1993년 12월 19일부터 따지더라도 십 년을 넘겼습니다. 글쓰기로 방과후 공부만 하다 첫 계절학교(흔히 캠프라고 하는)가 열린 게 1994년 여름이었습니다. 그 때는 고작 두 곳이 전국에서 초등 대안학교를 준비하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서울에서 저희가(지금은 영동), 대구에서 또 다른 모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대구모임은 이제 실체는 흐려지고 추억만 짙다 합니다. 그래도 그곳의 중심으로 있던 두엇 교사가 다른 대안학교에서 자리를 잡았다 들었습니다.
대안학교나 공동체조차 잘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된 대안교육과 공동체 운동에 돈도 없고 힘도 없고 명망가도 없이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학교와 공동체 삶을 통해 세상을 보다 선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울 학교를 계절학교와 방과후공부, 그리고 들공부를 통해 십 년도 더 넘어 되는 세월을 연습하고 실험하고 실천해온 거지요. 기득권이란 걸 갖지 못한 이들이 열정과 꿈 하나로 버팅겨 오면서 별 것도 없는 존재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어가며 포기하지 않고 결국 이루더라, 그것만으로도 우리 아이들에게, 특히 없이 사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만났던 아이들에게 희망일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마침내 상설학교로 문을 열 2004년을 내년으로 두고 있습니다.
학교를 세우면, 교육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라면 모를까 돈이 없어서 못 오는 아이는 없게 하자고 열심히 생산공동체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임금으로 나가는 돈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재정에 힘이 실립니다. 먹을 것들도 학교 둘레에다 유기농으로 벌써 길러먹고 있지요. 아이들이 평생 지니고 갈 몸을 제대로 공양하기 위해서도 바른 먹을 거리를 챙겨야 한다는 믿음때문이기도 하고, 농업문제를 자기 문제로 인식해서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없이는 진정한 자립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한 까닭입니다.
마침내, 2004년인 내년 음력 삼월삼짇날 진달래화전을 부쳐먹으며 생태공동체와 학교가 함께 하는 상설학교 문을 열 기대로 저희는 한껏 부풀어있습니다.

3. '자유학교 물꼬' 살아온 이야기

1989년 12월 삶을 가꾸는 글쓰기 <열린글 나눔삶 터>로 출발
1993년 12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사 모임 <열린글 나눔삶 터>
1995년 8월 <자유학교를 준비하는 모임 물꼬>로 넓힘
1996년 10월 충북 영동군 상촌면 대해리의 분교(옛 대해분교)를 임대.
도시공동체를 실험하는 서울 연남리,
영동에서 나중에 세울 학교를 연습하는 영동 공동체,
방과후 공부를 비롯해 중심 작업을 하는 서울사무소,
이렇게 세 곳에서 자유학교 준비.
1999년 3월 <자유학교 물꼬>로 넓힘
2001년 12월 '서울 자유학교 물꼬'가 영동으로 내려와
'영동공동체'와 하나를 이루어
구체적으로 생태공동체와 학교를 세울 준비를 함.
2004년 4월 21일(음력 3월 3일)
생태공동체와 학교가 함께 가는
'자유학교 물꼬' 상설학교 문 열 계획.

환경으로든 삶으로든 전지구적 위기라는 시대에서 우리는 그 원인에 비뚤어진 교육의 자리가 크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또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교육 안에서의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것에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자연과 사람이, 자연과 자연이, 서로 끊어진 너덜너덜한 관계의 끈으로 겨우 지탱해가고 있는 세상에서 이 땅의 아이들 역시 그 삶에서 한치도 어긋지지않고 고스란히 피폐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물어야 했습니다.
"정녕 학교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때로 종교로 혹은 같은 계급끼리, 또 다르게는 어떤 특별한 집단성으로 행복을 포장하고 있을 때 저 편 거리에서 사람들이 굶거나 아파서 버려진, 이제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질문조차 진지하기는 커녕 자칫 자기 위안이기가 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물꼬는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내게(우리에게, 인간에게) 요구되는 삶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아에만 침몰한 자기 수양이 아니라, 세상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세상과 교통하는 자아, 그래서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모든 생명의 연관고리를 찾으려는 공부를 해야 그 답은 가능하며, 그런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고 실천하는 세상은 아무 것도 버림받지 않는 세상, 층이 지지 않는 세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혁명을 꿈꾸었던 전 인류사의 숱한 사람들의 열정처럼 우리 존재들이 건강하게 자라 충만한 세상을 열기를 바래왔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1) 배움은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내게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이냐’ 묻는 것을넘어 ‘내게 요구되는 삶이 무엇이냐’를 묻습니다
2) 배움은 모든 생명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아 삐뚤어진 관계(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3) 배움은 우리가 사는 세상, 날마다의 내 삶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4) 배움은 일과 예술과 명상을 통해 자기를 다듬어(실력) 섬기고 나누는 삶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만듭니다.

배움에 대한 생각을 이리 정리하고 배움에 이르는 길을 막연하게 아래처럼 잡았습니다.

1) 일과 예술과 명상을 통한 통합교육
2) 개개인의 내적 삶의 통일성
3) 요가와 명상 전래놀이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영적 능력 개발
4) 진리에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으로 고등교육에 필요한 역량 갖추기
5)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책임감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도록 돕기
6) 생태적 자각을 통해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하기
7) 종교, 인종, 신념 또는 성에 기초한 차별로부터 벗어난 보편적 시각 갖기
8) 자기를 다듬어 섬기고 나누는 삶
9) 공동체에서 어른들 교사 학부모의 삶을 곧게 세워 본을 보이기

다음은 지난 십 수년 자유학교 물꼬가 한 작업입니다.

3-1 계절학교

계절학교는 일과 예술과 명상을 통한 교육을 중심생각으로 놓고 물꼬에서 계절마다 여는 '계절 자유학교'와 '터별 계절학교'를 말합니다.
'계절자유학교'는 2004년에 세울 학교을 연습하고 실험하는 자리입니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서른 여섯 차례 열었습니다. 또한 1997년부터 연극터와 그림터를 시작으로 영상터, 소리터, 건축터, 과학터 계절학교를 차례로 만들어 독특한 프로그램으로 '터별 계절학교'를 해마다 두 차례씩 열고 있습니다. 모든 '계절자유학교'와 '터별 계절학교'는 통합교과식으로 열리고 있으며 2004년 상설 학교로 문을 열 오랜 연습이고 실천이며 실험입니다. 레지오 에밀리에의 프로젝트 수업과 자유 발도르프 학교의 슈타이너 교육 들을 우리 안에 견주어보면서 구체적으로 학교 교과 준비도 그 안에서 해왔습니다.
더구나 계절학교에서는 참가비를 낼 수 없는 저소득층과 고아원 아이들이 함께 함으로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를 고민할 수도 있었습니다.

3-2 방과후공부

14년을 해 온 글쓰기 모임을 시작으로 연극터, 그림터, 풍물터, 과학터, 한글공부방 방과후공부를 해 왔습니다. 연극터는 9기까지 했으며 6개월마다 프로극단 못지 않는 졸업공연을 올렸지요. 인권, 환경, 더불어 삶, 교육 등 우리 삶과 떨어지지 않는 주제로 아이들과 같이 고민하고 만든 공동창작이었습니다.
방과후공부는 또 2004년 상설학교에서 실제 쓸 교과를 연구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실제 아이들 속에서 연습해본 거지요.
또한 그것은 물꼬의 가치관을 녹여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그 세상은 나랑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나는 그 세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을 옹골지게 고민하는 자리였습니다.
일년 열두 달, 명절 때 빼고는 온통 아이들과 쓰고, 그리고, 구르며 지냈으며, 또한 아이들과 같이 커가는 시간이었습니다.

3-3 들공부

달마다 첫 번째 해날에는 물꼬가 1997년부터 계속 만나고 있는 고아원, 오류애육원으로 들공부를 갔습니다. 얼마나 다른 조건의 사람들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가를 보며 서로를 키워나가는 자리였지요.
달마다 마지막 해날에는 공연, 박물관, 전시회 따위를 구경하고, 사람들과 자연 속에서 우리 살이를 돌아보고 가꾸며 아이들의 세계를 넓혀주려했습니다.
꼭 이렇게 정해진 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우리가 달려갈 곳에, 우리 손이 필요한 곳에 그렇게 아이들과 서 있었습니다. 2002년 6월에는 한겨레 주최 시민 달리기 대회 <행진 6.10>에 100여명이 참가해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같이 뛰며 우리의 역사를 깊이 생각해 보기도 하였지요.

3-4 물꼬 큰 행사

물꼬의 생각을 물꼬 안에서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들고 나와 아이들이랑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일본 키노쿠니(일본의 썸머힐) 탐방(1995), 삼풍대참사 1주기 진혼 예술제(1996), '통일은 참 좋다'(1997), 97 새로운 학교를 꿈꾼다 - 일본 '키노쿠니' 자유학교 초청, 98 새로운 학교를 꿈꾼다 - "생태공동체운동과 교육", 99 새로운 학교를 꿈꾼다 - "아이들과 만드는 도시 공동체” "99년 9월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것은" 같은 행사들을 했답니다.

3-5 그 밖에

다른 시민단체, 혹은 다른 대안학교, 여러 대학에서 물꼬의 생각과 작업을 나누는 자리가 많았습니다. 한국 지역사회교육 각 지역 협의회, 고아원 오류애육원(글쓰기, 그림, 연극, 영어/ 1996년 3월 ∼ 2001년 12월), 원광 유린 장애인종합복지관, 서울 정독도서관 중등부, 어린이 도서 연구회 지부 같은 곳에서 강연도 하고 아이들과 공부도 했습니다.

4. 아이들에게 남긴 것

자유학교 물꼬의 교육결과를 대학을 잘 간 아이들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직 상설학교가 되기 이전 짧은 기간으로서의 학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간이 짧다 하나 꾸준히 같은 아이들이 오는 비율이 커므로 누적되는 교육의 결과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더라도 아이들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재단이 가능한지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 아이들 삶을 흔들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처입은 아이들이 와서 치유하고 돌아갑니다. 함께 나누지 못했던 아이들이 마음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고 돌아갑니다. 앉아서 공부밖에 할 줄 몰랐던 아이들이 몸을 움직일 줄 알게 됩니다. 대동놀이, 전래놀이를 통해 장난감 없이도 얼마나 흥겨울 수 있는 지를 배우고 갑니다. 불편한 곳에서 사람이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칩니다. 아이들이 생태적 감수성을 익히고 자기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 갑니다. 아이들의 삶이 그리고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는지요.
무엇보다 물꼬를 거쳐간 아이들이 물꼬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배운 것들이 참이라는 확신으로 자원봉사를 하며, 이곳에서 교사의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교사가 되려는 생각이 없더라도 논두렁(후원회원)과 품앗이 일꾼(자원봉사)이 될 것을 약속하고 실제 그렇게 합니다. 결국 이곳을 거쳐간 아이들의 지지와 연대로, 그리고 이곳을 다녀간 숱한 어른들, 다른 학교에 있지만 이곳에서 교사훈련을 쌓았던 이들의 박수로 물꼬가 힘을 얻습니다.

5. 남은 일

아직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자유학교 물꼬는 갑니다. 대안학교가 요 몇 해에 걸쳐 수십 개가 새로 생겼고, 물꼬보다 먼저 생겼던 곳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이처럼 삶과 교육터가 한 덩어리로 가는 곳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가지 않은 길이라 어렵고 가지 않은 길이라 또한 쉽기도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았던 교육, 상상력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배워보지 못한 일들이라 우리 상상력의 밖일 때가 많지요. 끊임없는 교사훈련을 통해 나아질 것을 기대합니다.
역시 재정구조의 열악함이 이곳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더구나 지금 중산층 이상 자녀들의 전유물이다시피한 대안학교운동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싶어하는 물꼬로서는 살림이 더 어렵습니다. 계절학교나 방과후공부에서 저소득층 아이들과 고아원아이들의 비중을 계속 늘려왔으므로. 앞으로 상설학교에서도 공부값을 거의 받지 않고 가려고 하며 우리 공동체 사람들이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할 계획도 있습니다. 그런 구조에서 외부로부터 돈이 들어오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가 일한 것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꼬에서 아이들이랑 짓는 농사는 '체험'이라는 범위를 넘어 '생존'의 문제랍니다. 따로 임금(앞에서도 나왔듯 교사, 공동체식구들은 같이 살림을 살면서 용돈으로 십만원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으로 나가는 돈이 없는 것이 그나마 재정에서 큰 도움이 되지요.
자본주의, 상업주의 안에서 종교를 바탕하지 않고, 뛰어난 지도자도 없이 공동체로 살기는 쉽지 않음을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십 여년의 물꼬의 훈련은 바로 그 과정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하였다더라도 누가 내일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이들과 하는 일이란 것은 상수보다 변수가 많은 일 아니던가요. 그러므로 물꼬의 조건이 흔들릴 여지가 많을 수도 있겠으나 지속적인 영성훈련과 몸훈련으로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6. 나오며

과거 물꼬에서만 했던 고유한 프로그램을 이제는 계절학교를 열고 있는 수많은 단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5년 여만 보더라도 물꼬에서 고유하게 하던 것들이 다른 여러 곳에서 보편화되는 과정을 찾아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물꼬에서만 썼던 특별한 용어들까지도 이제는 많은 단체에서 공유하고 있고 나아가 계절학교 시간표를 고스란히 좇아하는 단체들까지 등장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물꼬 작업의 긍정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돈을 벌려고 작정하면 그 시장성의 가치까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도 곳곳에서 이런 유형이 등장하는 까닭이겠습니다. 어쨌든 이제 물꼬는 더 이상 '고유'하지 않으며 그래서 새로운 질이 필요한 시기에 상설학교를 열려는 객관적 필연의 2004년을 맞았습니다.
지금 영동 대해리 자유학교 물꼬에는 어른 다섯 사람(둘은 지금 여행중)과 아이 하나가 살면서 이 지역 아이들과 함께 '동네사랑방'을 방과후에 하고 있으며 계절마다 계절학교를 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필요한 다른 나머지는 자원봉사를 오는 이들이 메꾸고 있지요 용돈 십만원을 또 입에 올리는 건 궁색하고 옹색한 삶을 묘사하려는 게 아닙니다. 남의 것을 앗아다 살아가는 이 시대 야만의 삶에서 실제 물꼬가 어떤 삶을 지향하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 작은 대안을 보여 주는 거지요. 정녕 공동체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기반 없는 작은 단체 하나가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은 발품 손품 보태는 가난한 품앗이일꾼(자원봉사자들)과 넉넉하지 않아도 가진 것을 나눠주는 논두렁(후원회원)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같은 뜻있는 단체의 지원(2003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학교 물꼬가 혹여 잘한 게 있다면 모두가 그들의 공일 테지요.
자유학교 물꼬는 여지껏 해온 물꼬의 작업이, 그리고 앞으로 하려는 작업 역시 이 땅에 희망 한 가닥을 주는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 옴짝거려..."
그렇게 시작하는 시가 있었더랬지요. 지지않고 일어나 일어나 이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공부를 아이들과 할 것입니다. 이 길이 맞다면 또 다른 이들이 함께 할 테지요. 우직함이 산을 옮긴다지 않던가요.
바램이 차고 넘치면 이루어진다 하였습니까. 오직 바램으로, 꽉 찬 바람으로 2004년을 기다립니다, 저어기 봄 산 너머 햇살퍼져오는.

(200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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