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7.나무날. 맑음

조회 수 95 추천 수 0 2024.03.28 23:47:21


느지막이 아침뜨락에 들었다.

고라니 두 마리가 발 앞에서 놀라 산 쪽으로 뛰었다.

인적 없던 지난 2월 한 달, 저들이 아주 물 만난 고기였겠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낮은 돌탑(이라기보다 돌무데기에 가까운)들이

멧돼지나 고라니 발길에 걸렸겠다 싶게 밟아 무너진 흔적들.

저것들을 또 쌓으며 봄날이 가겠구나.

 

학교에서는 가마솥방 난로 연통을 손보다.

겨울 꼬리가 긴 이 멧골,

아직 한참은 연탄을 넣어야한다.

지붕 위로 빠진 연통의 끝이 삭아 학교아저씨가 올라가 바꾸다.

 

인도에서 만난 여러 인연들의 인사가 줄 잇는.

인도인도 있고,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서 그리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와

그 땅에서 같이 요가 명상했다. 길지 않은 날을 수행에 푹 빠져 지냈네.

그 인연들이 또 다른 인연들을 연결해서,

여기 와 대전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이와

감기가 좀 수습되면 만나기로도 한다.

같이 요가명상 모임을 꾸려보려는.

 

어제 읍내 도서관에서 명상 관련 책들과 함께 들고 온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2022)

그간 빌리자 했으나 두어 차례 헛걸음. 읽는 이가 많았다.

아버지의 장례 사흘 동안의 기록.

해방 전후 시공간에 살았던 이들,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진 촘촘한 관계들이 그 빈소를 오간다.

시도 때도 없이 사회주의자였던, ‘사회주의자답게 유물론적인 결론에 이르던

구 빨치산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향에 뿌리를 내리며 이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

그 고향에는 서로 적이었던 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사회주의, 아버지의 빨치산 시대에 그것은 이데올로기라기보다 현실이었다.

80년대 우리 세대의 사회주의랑은 달랐던.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사회주의자일 수 있지 않았던가 싶다. 생활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의 민중은 이웃이었던 거고.

살아생전 아버지는 늘 그랬다. 빚을 떼여도,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태도였을.

그것은 아버지의 태도에, 아버지 대신 빨치산들이라고 대입해도 될.

단문이어서도 그렇겠지만 무거운 이야기를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그렸다.

 

책장을 넘기며 자주 웃었고, 가끔 눈물 글썽였다.

예컨대 이런 대목.

제 아버지도 아닌 작은 아버지(화자의 아버지)의 역사가 자신의 인생을 막아서서 육사를 못간 사촌 오빠와

화자가 근 40년 만에 마주했을 때 병색이 짙은 그 오빠는 그랬다.

괜찮다, 괜찮아.”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세상에 조밀하게 얽힌 그물망 속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랑 맞담배 피던 열예닐곱 노랑머리 베트남2세가 단단하게 제 삶을 잘 세우는 걸 보며

주인공의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릴 때도 가슴이 일렁였다.

그 봐라, 내가 뭐랬냐? 믿으랬제?”

조문을 온, 빨치산들 사이 심부름을 하던 어린 빨치산 이야기에서도 눈시울 붉어졌다.

우리 동지들 목숨이 나한테 달렸다 생각하면 한나도 안 무서와라...”

형한테 갇혀 긴 세월 피해의식이 컸던, 그래서 얼굴 보지 않고 살던 작은아버지가

(화자의 아버지)골을 안고 울 때도 덩달아 울었다.

70년 지나 비로소 서로 부둥켜안은 형제라.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 부활하는 거,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화자가 말했다.

아버지의 빈소 앞에서 화자는 비로소 아버지와 화해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에 손을 내민, 혹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 시대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동학농민혁명군의 결을 산으로 들어갔던 그들에게서도 본다.

그들의 진정성을 믿고,

그런 진정성이 보다 선 쪽으로 세상을 끌어왔다 생각함.

 

젊은 날의 높은 꿈이 어떻게 개인사에서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며(소설이지만 르포 같았던)

혁명은 결국 낙관적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었다 싶더라.

삶이란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이겠구나.

나는 어떤 태도로 사는가.

 

, 딱 하나 아쉬웠던 것은, 작가의 말은 짧았으면 좋았겠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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