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 2.나무날. 맑음

조회 수 1150 추천 수 0 2008.10.19 12:17:00

2008.10. 2.나무날. 맑음


농사라고 별 지어본 것도 없어 그런지
호박농사가 제일 수월하다 싶습니다.
그게 또 딱히 농사라고 부를 게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누구라도 구덩이 하나 파고 씨앗 심고
거기 오줌똥 들어부어놓으면
저 알아 줄기 뻗고 꽃 피고 호박 다는 것이니.
얼마나 잘도 달리는지,
결혼식에 자식들 주렁주렁하라고 폐백에서 대추를 던지는 걸 보며
저는 늙은 호박 한 덩이 내미는 상상을 하게 된다지요.
이 가을 여기 저기 호박 지천입니다.
곶감집 언저리에도 된장집 울타리에도
그리고 닭장 앞 밭둑에도 둥글둥글 호박들이랍니다.
채썰어 나물해먹고 밀가루묻혀 호박땡땡이도 하고
넓게 볶아도 먹고 전골에도 찌개에도 썰어넣고
간간이 호박오가리로 만들고 있지요.
이것 하나로도 풍성한 가을이다 싶습니다.

“무리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세상에! 앉아주고 서서 받는다더니, 딱 그 짝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자동응답기에 남기신 말씀이었지요.
되려 마음이 죄송해서 당장은 전화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들인고 하니...
별 필요한 것도 없는 이 산골 삶에도
때 아니게 돈으로 하는 고생이 생겼댔지요.
작은 공사 하나를 시작하면서
물꼬의 오랜 논두렁 되시는 분이 공사대금을 빌려주셨더랍니다
(군 보조금은 완공된 뒤에 나오지요).
덕분에 시간은 걸리지만 순조로이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게 또 다른 사연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샌드위치판넬로 외부업체에 공사를 준다 해도
군에서 받은 견적이 무려 3천만 원이 넘는 일이었습니다.
결정된 보조금은 거기에 턱없이 모자라니
어째도 물꼬 자체 비용이 추가 되어야 했지요.
그래도 이래저래 오가는 이들이 손을 보탠다면
인건비가 따로이 들 일은 적으니 우리 손으로 해보겠다고
자체시공으로 시작했더랍니다.
어찌되었든 빌려온 공사비를 10월 1일자로 갚는다 했지요.
그 정도면 완공하고 군에서 보조금을 받는 날까지
충분하다 생각했던 게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들로 공사는 하염없이 더뎌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약속이었지요.
그 돈이 당신 삶을 흔드는 건 아닐 것이므로
사정을 말씀드리고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나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약속’이니까요!
어려울 때 아무 조건 없이 선뜻 내준 마음에 대한
최소한의 갚음 같은 것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어찌 어찌 조금 무리하게 보내드린 걸 빤히 들여다보듯
앞서 얘기한 그런 말씀으로 인사가 돌아왔던 것입니다...
나이 먹는다고 다 어른 되는 게 아니며
경제적 부가 꼭 사람의 여유는 아닙디다.
늘 고개가 숙여지는 어르신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무슨 재주로 그런 분을 알 수 있겠는지요,
다, 물꼬 복이겠습니다.

몇 날 며칠 드물게 까마귀가 많이도 울어
내내 마음 불편했더랬습니다.
그예 친구 하나의 죽음 소식을 들었지요.
스스로 끊은 목숨이었습니다.
먹먹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가끔 그렇게 끈을 놓고 싶어 한 건 아닐까, 습관처럼,
그리 화들짝 놀랬습니다.
갑자기 청소를 시작했지요.
살아야겠다,
살아 움직여야겠다,
그렇게 빡빡 걸레질을 했습니다.
그나마 물꼬의 건강한 일이
혹은 아이가, 혹은 남편이, 혹은 제자가, 혹은 동료가
거뜬히 일으켜 세워준 날들 아니었나 싶습니다.
청소를 합니다, 늦은 밤 아침 햇살 아래처럼.
‘사느라 애썼다... 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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