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데, 천지 삐까리여!”

경상도 방언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이나 물건이 혹은 어떤 상황이 대단히 많다, 흔할 때 쓴다.

그런데 천천히 그 말을 곱씹어보면, 세상에! ‘천지 빛깔’이다!

천지에 빛깔이 얼마나 많겠느냔 말이다.

가을색이 천지 삐까리다.


오전, 지하수 보수공사를 어제에 이어 하기로 한 사람들이

9시가 지나서도 소식 없었다.

10시, 여전히 감감이다.

11시, 오늘은 바깥수업을 나가기 전 두어 곳 들릴 곳도 있으니

이제는 내려가 낮밥을 차려야 할 때,

일하다 말고 뚜껑이 열린 지하수 펌프장의 뚜껑을 닫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문을 나섰다.

그제야 트럭이 들어섰다,

많은 일이 우리가 그만 포기한 그 시점에서 길과 연결되고는 하듯.

위내시경 같은 장치로 지하수 안을 들여다보며 작업 공정을 어림잡고

함께들 내려가 국수를 말아먹었다.

그리고 낮 3시 경 작업이 끝났다는 소식을 받았네.


어머니께 이른 아침 전화를 넣었다.

나도 어머니 계시다.

잠을 한 시간도 채 이리지 못한 밤 끝이었다.

투정을 부렸다, 어릴 때도 아니 해본.

"산골 학교 일이 힘들어서 그라제? 하다도 없으니까 얼마나 힘이 들겄노..."

스물 댓 살 무렵 늦은 밤 거리에서 동지들과 옴팡지게 술을 마시고,

80년대는 그렇게라도 지나야했던 세월이었거나 그렇게 해야만 했던 시간이었거나,

공중전화박스에서 생각나서 했다며 동전을 넣었다,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는 용도인줄로만 아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투정내지 푸념내지 사랑 고백쯤을 했던?

그리고 오늘 전화를 걸다.

아, 만년 같은 시간의 열흘이었던 게다.


마음에서 헤어날 길 없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멈춰서 호흡 한번 크게 해보면,

그리 파도를 탈 일도 아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잠시 뒤 또 의기소침해지지만...)

흘러갈 지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든 아니든.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까 봐 우리 두려워하지.

그런데, 무수한 입체의 시간들로 이루어진 우리 생을,

그 방향을 알 길 없음을 우리 이미 다 알잖어.

산자하고든 죽은자하고든

이별은 누구에게 다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상처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이별, 혹은 생의 많은 어려움은

그것을 겪은 첫 번째 화살이 문제가 아니지.

그것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두 번째 화살이 늘 문제.

마음이란 게 이렇구나, 내 마음이 이러하구나, 마음의 작용을 이해하고,

내가 겪는 일들을 응시할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가 어찌 통제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별의 고통은 다만 슬픈 상태.

이것은 사랑만큼이나 우리 안에 있는 숱한 감정 가운데 하나.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

그 어떤 대단한 환희나 통렬한 절망도 마찬가지.

기쁨이 그러하듯 이별의 고통도 계속되지는 않는다, 결코.

슬픔을 그저 받아들일 것, 즐거움을 우리 그리 받아들이듯.

다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

이별은 그저 쓸쓸한 일일 뿐이란다.

동토는 봄이 되면 녹는다.

지금은 다만 우리들의 긴 겨울일 뿐.

겨울임을 알면, 그리고 그것을 잘 바라보면

그것이 훈김이 되어 봄이 우리 곁에 와 있으리.

자신을 돌보고 아끼자.

내 가장 가까운 친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나 자신.

걸어도 좋고 차를 마셔도 좋겠다.

잘 읽히는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어도 좋겠다.

물꼬 밥 먹고 가도 좋겠구나, 걸음 하려무나.

그리고, ‘지금’에 살기!

때로 계획하고 목적하고 그것을 성취하기도 하지만

행복이 그 도착지에 꼭 있는 건 아니지.

그래서 행복은 인생이라는 '길 위'에 있다지 않더뇨.

지금 그대는,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하는’ 중인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 동지이고 동료이고 벗이고 제자인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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