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올랐다.

중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에 나무둥치 하나가 사람 모양을 하고 섰는데

한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아희들아, 수만휘, 수능날 만점 시험지를 휘날리자라는 수험생들 커뮤니티처럼

그래, 만세다, 우리 아이들!

수능이 낼모레.

최선을 다했다 말할 수 없는 이조차 쉽지 않았을 날들이었으리.

돌아보니 그냥 지나간 날이 없었다, 어디 그들이라고 다를까.

정녕 욕봤다! 애쓴 흔적들은 어떻게든 남을지라.

이튿날 아침엔 산을 넘어 하늘을 밀어 올리는 해 앞에 기도도 하였나니.

그대들을 잊은 적 없다. 절하지 않은 날이 없다.


<태백산맥> 어디서던가,

산속에 산을 품은 지리산의 준령들은 북으로 치달아 오르다가 덕유산을 만나고,

덕유산은 가쁜 숨을 몰아 추풍령에 다다라선 속리산으로 건너뛰었다지.

덕이 많은 너그러운 모산,

그곳이 덕유산이었고

총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었던 빨치산들의 무대 한 장도 그곳이었다.


상설학교로 문을 열고, 학기를 시작하고 닫는 건 산에서였다.

2004학년도 가을학기를 닫을 무렵도 우리는 산에 있었다; 덕유산

첫눈으로 은백색의 조릿대가 장관이었던 그해 11월 마지막 쇠날.

겨울 낮 4시는 하산을 해야만 했다.

100m만 남았을지라도 돌아 나올 시간엔 정상을 포기해야한다는 걸

우리는 그 산에서 배웠다.

1km를 남겨놓고 누구라도 향적봉을 찍고 돌아오는 걸로 결정하고

올라가는 데까지 가서 돌아오는 이와 합류하기로 했더랬다.

열심히 달려 꼭대기를 밟고 돌아섰을 때 일곱 살 류옥하다가 따라붙어 있었지.

잊고 간 무릎보호대로 고생하던 내게 괜찮냐 여러 차례 물어주던 예린이 그 아이도

어느새 나이 스물을 지나 지난 여름 품앗이일꾼으로 계자를 다녀갔고나.

바람과 가파름과 눈과 어스름을 헤치고

따뜻한 백련사 해우소에 이르러서야 우리들은 긴장이 풀렸고,

공양간에서 얻어온 요깃거리까지 챙겨먹고는

그때부터 어둔 길을, 야간산행이 되었다, 아는 노래란 노래는 죄 부르고

물소리가 떠날 만치 판소리도 하며 유쾌하게 돌아왔더랬다.

그런데...

“조난으로 방송 탈 뻔했다야.”

아이들 포함 열댓 올라간 이들이 돌아오지 않고,

대피소에선 보았다는 연락이 없고,

눈은 내리고 날은 어두워지고,

콘도에서 잔다더라는 말이 잘못 전해져 산에서 잔다는 소문이 퍼지고,

우리를 실어가려 온 선배를 통해 전해진 아래 소식이야 까마득했을 밖에.

10년을 품어오던 꿈을 펴며 상설학교 문을 열던 그해,

정월 초하루도 거기서 맞았다.

그리고 꼭 10년 뒤 2014년 10월 첫 주말, 안나푸르나 예비산행의 하나로 올라

뒤를 돌면 지리산에서 달려오는 산자락이 가슴 일렁이게 했던 중봉에 있었다.


짐...

없다고 혹은 가볍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적당하게 어깨를 눌러줄 때 오히려 안정감이 생기고 힘 역시 덜 들기도.

나이 스물둘 영월 동강 문산리에서 넘어오던 산에서 일찍이 배낭을 통해 깨달았던.

때로 삶의 십자가가 우리를 밀고가기도 하더라는.

그런데 그런 깨달음들이 유지될 수 있다면

깨달은 위대한 고승들인들 날마다 그리 수행할 까닭이 어디 있으랴.

덜어내 놔도 될 걸 가방을 잘못 쌌다.

무거웠고, 두통이 딸려와서도 고생 좀 했다.

사는 일도 그러할 테지, 짐을 제대로 못 싸서 무겁기도 하고 머리도 아프고.

매고 갈 짐을 잘 싸지 못할 때,

자신이 모를 땐 아는 이에게 물어도 좋으리.

좋은 조언자를 만나거나 괜찮은 안내자를 만나거나.

날 아끼는 사람이면 더욱 좋을 것.

내 짐이 무거운 걸 안타까이 여겨줄 이라면.


어느 순간은 버려진 아이마냥 외떨어져 오직 홀로 걸었고,

그러다 안간힘을 쓰며 기분을 올리는 어느 이처럼

노래도 부르고 해찰도 하고 뒤도 돌아보며 상처 입은 자신을 달래주기도 했다.

갑자기 내려갔던 기온이 잠시 펴졌던 첫날,

백련사에서 오수자굴로 해서 중봉 지나 향적봉 대피소에 이르렀다.

오르는 길은 흐렸고, 산꼭대기는 안개 자욱했다.


오르내리며 상처 입은 짐승 같았던 시간이 겹쳐졌다.

때로는 지나간 기억으로 때로는 시시각각 오가는 말 속에.

언젠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벗이 말했다, 나는 거절이 두렵다.

나도 그렇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그가 말했더랬다.

사람 참 모른다.

특히 그가 살아온 길속에 만났던 사건들을 우리는 사실 모른다.

그를 형성했을 그것들을.

누가 누구를 알겠는가.

하지만 또 한편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기도 하리.


대피소의 밤. 한밤 깨어나 밖에 발을 내려놓았을 때

달빛이 그리 환한데도 저 편으로는 무수한 별도 또한 뿌린 하늘,

경이롭고 신비하고 그리고 고마웠다.

마음의 누더기를 기워주었고, 부끄러운 날들을 안아주었고,

분노를 쓰다듬어주었고, 주었고, 주었고, 주었고.

치유와 치료와 위로와 위안이 그렇게 자연에 있을지라.


이른 새벽의 산장 2층, 사람이 들지 않은 널찍한 마루에서 아침수행도 하고

향적봉에 올라 해도 맞았다.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볼까 싶잖다더니,

산을 누가 알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해가 났다.

오르기 직전이 더 장엄하였노니.

모든 것이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서 더욱 빛나듯이.

연극을 무대에 올릴 때면 그렇지 않던가.

정작 뚜껑을 연 연극보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고단하나 같이 웃고 응원하는 시간이 주던 진한 감동...


내려올 땐 백련사 쪽으로.

그런데 노여울 일 하나 있었다.

그만 다리에 맥이 다 풀려 털썩 앉았다가

분노가 다시 일어 나무 한 그루를 향해 얼마쯤의 돌들을 마구 던지다가

그러다 다시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해지고서야 일어났을 지도 모를.

무수한 일들이 그렇게 우리 삶에 마주할지라.

그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도 결국 내가 정하는 것이리.


답을 주어야 하는 일은 늘 어렵다,

먼저 살았다고, 선생이라고, 어른이라고, 혹은 자신에게.

때로 어떤 길은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이 있다.

하지만 이미 걸은 길을 어찌 하랴.

적어도 이제 가려는 길은 얼마쯤이라도 내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산은 넘치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쓸쓸함을 견디는 시간일 때도 있다.

어디 산오름만 그럴까, 우리 살아가는 날들이 다 그러할.

치욕을 주려던 이에게 치욕을 느끼면 지는 거다.

치욕을 주려던 이에게 그 치욕을 비껴가는 길은 그 치욕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심지어는 되보내주는 것이다.

치욕이 있었다면 바람처럼 내 곁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것.

그런데 아느냐,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것은 날마다 죽는 일.

어떻게 죽느냐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인.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건배, 축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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