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에 두고 온 것들이 거기 먼저 가 있거나

떠나온 것들이 달그락거리며 따라오거나

지나간 것들을 업고 오르느라 산사 가는 길은 더 멀더라.


첫날 해질녘에야 경북 봉화 청량산 아래 입석에 닿아

저녁이 내리는 산길을 걸었다.

겨울 일정 뒤 쉬어가는 며칠 나들이로 잡았던 사흘, 점주샘이 동행하고 있었다.

맞이처럼 범종루에서 치는 종소리를 들으며 절 마당에 발을 놓았네.

범종루 현판을 쓴 초정 권창륜 선생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제자라는데

살아계신 분들 가운데 최고라고들.

절이 꽃술처럼 청량산에 앉았더라.

난간에 놓인 듯한 오층석탑을 탑돌이 하고,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인 유리보전(약사전)에서 저녁예불에 함께하다.

서방은 아미타여래불(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이,

동방은 이 약사여래불이 다스린다는.

이 본존불은 종이를 녹여 만든 지불이라던데, 어찌 녹였단 말일까...

유리보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란다.

그래서 이 산 아래 마을은 공민왕이 동신인 곳이 여럿이라 했다.

나많은 보살(아마도 공양주일) 두 분의 기도가 지극하더라.

그 곁에서 몸을 뉠까 하다 다시 어둔 산사를 빠져 나왔네.


관광지라 해도 산마을 겨울이라 가게들 문도 얼다.

열렸어도 손님을 들이기에 늦다는 시각,

뭐라도 먹을 만한, 묵을 만한 면소재지 명호로 나와 불 밝힌 식당에 들었는데,

그마저도 영업 끝이란다.

“밥이 없어요...”

“어째요?”

낙심하는 마음을 헤아린 주인이 민박집에 연락을 해주었다.

“밥들을 못 먹었데. 거기 밥만 있다면 반찬은 우리가 보내주께.”

얻어먹은 밥상이 더 거하였을세.

한밤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는데,

뭐라도 하나 사지 하는 슈퍼도 오늘따라 더 일찍 문을 닫았다나.

고기 안 먹는다 쳐다도 안 볼 한 치킨집서 뜻밖에 맛난 음식을 찾아내었으니

이렇게 척척 맞아떨어지는 차례들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더라.


이튿날 새로 문을 연 한 가게를 축하하며 떡도 얻어먹고

버려진 것들로 작품을 곳곳에 세워둔 숲 한가운데 있는 캠핑장도 들었다가

다시 청량산을 올랐다.

어제는 산사 뜰을 걸었고, 오늘은 산을 좀 오르자 한.

입석에 다시 차를 세우고 산길을 되짚다.

갈림길에서 절 쪽으로 가는 길과 갈라져

명필 김생이 공부했다는 굴과 폭포 지나 응진전에 이르렀네.

나한 열여섯 분을 모시면 응진전, 오백 분을 모시면 나한전.

아! 장대한 바위 앞에 자리 잡은 응진전 댓돌 위에서 오래오래 볕을 바랐다.

전망 좋다는 어풍대를 기어기어 올랐다가 내려와 총명수도 마셔보고

산길 한참 걸어 작은 능선에 올라섰는데,

마침 관리소에서 나왔다는 두 분의 안내를 그때부터 받기도 하였네.

“올라가 보세요!”

하여 장인봉으로 바로 향할 걸음을 깎아지른 자소봉으로 잡았다 내려왔다.

“저곳을 두고만 갈 뻔했네요...”

이제 능선, 하지만 온통 바위인, 타고 걷는데,

홀로 겨우 지날 오솔길을 앞서간 점주샘,

한 봉우리 앞 표지판을 가리며 무슨 봉이냐 물어왔다.

“무슨 필봉일 것 같어. 붓 한 자루쯤 있겄지.”

“그래, 탁 보니까 필봉이야.”

“탁필봉? 진짜?”

그랬다. 붓 있으니 연적도 있어 연적봉 지났고, 뒷실고개에 이르렀네.

자란봉(알 같은 바위로 둘러쳐 알 란 자인가 했더니 난초 난)과 선학봉을

하늘다리가 잇고 있더라.

장가계 원가계가 부럽잖더만. 비행기 타고 갈 게 아니라 예들 오시기.

이리 오래 산을 오를 계획은 아니었던 지라 물도 먹을거리도 없이 장화에 치마였는데,

물이며 파이와 비스킷도 얻어먹었다.

순조로움, 뜻밖의 도움들이 주는 기쁨들.


장인봉 갔다가 올랐던 길을 되짚지 않고 장인고개에서 청량폭포 쪽을 향해 내려서다.

두들마을이라는 곳임직한 비어진 몇 집을 가로질러 산허리 옛 선현 길을 따라 청량사로.

멧돼지들 노닐다 놀래 달아났는데, 나중에야 알았네, 멧돼지 출몰지구로 입산금지 길이었던.

어둑해오는 길을 혹 밤 짐승 만날까 나무나 바위를 탁탁 치며 걸음을 서둘렀고,

저녁 타종을 들으며 청량사에 이르렀다.

따라오는 목탁소리를 지고 산을 나왔네.

안동의 온천에서 피로를 풀었더라. 딱 맞춤했던!


사흗날, 안동의 병산서원.

숙제 같던 이곳이었다.

같이 오기로 여러 차례 벼렸던 선배를 세상 떠나보내고야 왔네.

병산 앞에 내 흐르고 모래강변이 좌악 펼쳐졌는데,

이 풍경 다 내려다보는 서원보다 예가 더 장관이라.

자갈들을 주웠는데, 오는 이 마다 이리 가져가면 어쩌나 걱정이더니

그때 병산이 우르르 쿵쿵 크고 긴 소리를 한참 내며 몸을 뒤챘다.

돌이 쏟아지데. 신기하기도 하지.

서원에 들어 드디어 만대루에 올랐으니, 고백하자면, 오르지 마라던 누였으나

오랜 바람이어 슬쩍 올라앉았던.

끊이지 않고 발길 이어지는 곳이었으나

한참 머무른 덕에 사람들 없던 틈 생겨.

만대루로 오르는, 한 덩어리로 된 계단은 여러 건축서에서 오래 봤던 익숙함에

서너 차례는 다녀간 것만 같았네.

여기 유명하다는 달팽이 해우소도 굳이 들어가 기웃거렸더라.


읍내에서 실어올 짐을 오는 참에 싣고,

작은 영화관에서 <조작된 도시>보다.

기다리던 박광현 감독,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영화는 천상병 시인의 ‘나무’로 시작하고 끝났다.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눈물이 핑 돌만큼 기뻤다, 박광현이 아름다운 시를 알아봐 줘서.


밤 10시에야 물꼬 닿아 그제야 밥을 지어

만찬을 누리는 사람들 마냥 밥상 앞에 찬찬히 지난 사흘을 펼쳐놓았더라.

고맙다, 아름다운 시간이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4596 2017. 3.23.나무날. 맑음 / ‘예술명상’ - 제도학교 지원수업 옥영경 2017-04-19 829
4595 2017. 3.20~22.달~물날. 흐리다 비, 그리고 개고 맑았다 옥영경 2017-04-19 817
4594 2017. 3.18~19.흙~해날. 맑음 옥영경 2017-04-19 780
4593 2017. 3.16~17.나무~쇠날. 맑음 / 기억 옥영경 2017-04-19 849
4592 2017. 3.15.물날. 맑음 / 줄선 날들 줄 맞추기 옥영경 2017-04-19 771
4591 2017. 3.14.불날. 맑음 / 숲속 학교의 성자 옥영경 2017-04-19 803
4590 2017. 3.13.달날. 맑음 / "첫걸음 禮" 옥영경 2017-04-19 786
4589 무사귀환, 그리고 옥영경 2017-04-06 1720
4588 2월 22일부터 3월 12일까지 ‘물꼬에선 요새’를 쉽니다. 옥영경 2017-02-23 1136
4587 2017. 2.21.불날. 맑음 옥영경 2017-02-23 931
4586 2017. 2.20.달날. 저녁답 비 / 홍상수와 이언 맥퀴언 옥영경 2017-02-23 2153
4585 2017. 2.19.해날. 저녁답 비 옥영경 2017-02-23 995
4584 2017. 2.16~18.나무~흙날. 밤비 내린 뒤 거친 바람 / 영월 내리 안골 옥영경 2017-02-23 826
» 2017. 2.13~15.달~물날. 흐림, 맑음, 가끔 흐림 / 청량산과 병산서원 옥영경 2017-02-22 956
4582 2017. 2.12.해날. 맑음 옥영경 2017-02-21 748
4581 2017. 2.11 흙날. 눈싸라기 몇 날린 낮, 그리고 보름달 / 정월대보름제 옥영경 2017-02-21 866
4580 2017. 2.10.쇠날 / 부디 읽어주시라, <거짓말이다> 옥영경 2017-02-20 850
4579 2017. 2. 9.나무날. 눈발 얼마쯤 옥영경 2017-02-20 833
4578 2017. 2. 8.물날. 흐림 옥영경 2017-02-20 872
4577 2017. 2. 7.불날. 맑음 / 오랜 농담 하나 옥영경 2017-02-20 813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