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 소설을 읽다 노래방 가다

조회 수 1034 추천 수 0 2003.04.09 02:38:00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피어라 수선화.
그리고 책장을 넘기고 있는
멋진 한세상.

읽는 순간에도, 책장을 덮고 나서도
가슴이 팍팍해져 한숨이 절로 나오던 소설들, 그이의 글들.

박완서, 공지영, 또 누구 누구.
내가 좋아했던 일련의 여성작가군.
여성동아 장편에 서른 여덟인가, 늦은 나이에 공모에 입선할때.....내가 일등 할줄 알았다.
여자들끼리 경쟁하는데, 내가 안되면 누가 되겠나.....도도하고 약간은 냉소적인 수상소감과 함께 읽었던 <나목>
나는 단박 박완서의 팬이 되었다.
총성 한방 묘사되지 않은 <나목>
아.
전쟁이 남긴 몸서리치는 스산함이라니.

몇번이나 되풀이 읽고 읽었던가. 문학회에서 습작할 때.
중산층의 허위에 대해, 아마 박완서 자신의 냄새나는 허위의식에 대해 노련한 외과의처럼 날카롭게 칼을 들이대던 소설.
아줌마의 늘어진 뱃살과도 같이 질펀하게 빤빤하게 끝도없이 이어지던 박의 글들을 샅샅이 찾아읽던 중
결혼을 하고 문화부에 있던 남편이 <드림> 도장이 선명했던 공선옥의 소설집을 들고 들어왔던가.

무슨 팔자가 이렇게 드셀꼬.
기가 차고 혀가 차고 가슴이 절로 시렸왔던.
껍질 벗겨 푸줏간에 덜렁덜렁 달아놓은 소고기 같이 벌건,
벌건 그이의 내면이 차라리 민망해서 버거웠던.
아주 어릴때부터 글을 쓰겠노라 가슴에 품었던 어린 강무지,
중산층의 소시민적 안온함에 젖어
까짓 글쯤이야....나의 질투였을까.
서둘러 둘러쳐진 나의 울타리를 확인하며 공선옥의 박복과 나의 행복을 경계지으며 만족했었지.
하지만
쉬이 떨쳐지지 않는 그이의 시퍼름, 칼칼하면서도 눅진함, 시림.

왠일인가.

공선옥의 글들이 이토록 담담할수가.
풀어놓은 글자가, 글자의 행간이 이토록 여유로울수가.
초기 그녀의 단편때와는 달리,
공선옥 역시 어쩔수 없는 운명의 흐름에 리듬을 타듯 유유자적 흘러가기도 하겠고,
강무지 역시 행복과 박복의 울타리가 뒤집어졌음에랴.

허허로움.
자궁의 허허로움이라고 표현했던가. 내 기억으론 피어라 수선화에서 나왔던 구절같은데.
가슴 속이 바람 든 무모양 찬듯, 빈듯.
유치원갔다, 학교갔다 들락달락 현관문이 떨어져나가도록 드나드는 아이들을 보며 뜻없이 헤실헤실.
자두의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다, 노래를 부르다 달가닥 거리며 묵은 김치를 총총 썰어 전을 부쳐 새끼들 입에 넣어주건만
오징어만 냅다 골라먹는 두딸년들. (공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평소 같으면 잔소리해가며 기어이 야채 부침을 한입 넣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오늘은 그럭하기가 싫어지는 건 또 왜인가.

"노래 부르러 갈까, 엄마랑?"

두 딸년들 앞장세우고 강변 노래 연습장에 노래 부르러 간다.
끝내 가고야 만다.
서른 다섯 홀로된 엄마가 자궁의 허허로움을 견디다 못해, 기어이 노래를 부른다.
품고온 강아지가 놀래지 않도록,
오늘은 <화장을 고치고> 이것처럼 조용한 노래만 불러달라고 주문하는 큰 아이.
뗀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곰세마리>를 외치는 작은 아이.

좋다, 좋다.

엄마는 익숙하게 마이크를 잡고 몸 흔들어가며 춤을 추고, 그예 두 딸들은 손에 들고온 껌과 코코아 한잔을 교환하다 분배에 문제를 일으켜 싸움을 하고, 텅 마이크를 떨어뜨리고, 부쩍 욕이 늘은 큰아이가 엄마랑 기분좋게 손가락까지 걸고한 약속까지 어기며 동생한테 분풀이를 하고,
작은 아이는 꽥꽥 거리다 울고불고, 반주는 여전히 귓전을 울리고, 울리고.
좋다, 좋다.
집에 우환이 있어 그런지, 아이들 정서가 사납다. 전에 없이 거칠다.

"대화가 필요해!"

세 모녀는 합의를 본다.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가!
워낙에 감각적이고 직관이 발달한 큰 아니, 사춘기 초기 증세가지 가세한 기운탓인지
설사병난 강아지 아롱이 안고 공주같이 턱 처들고 우아하게 노래하지만, 그 눈빛은 벌써,
이게 다 엄마 탓이야... 영락없다.
아직 어리기도 하지만, 언니와는 또 다르게 온 몸으로 사물을 인식하며 찬찬히, 자기식대로 새김질하는 경향이 강한 둘째.

"엄마, 이원하면 나 못봐?"

돌침대 위에서 늦도록 책을 읽으며 엄마의 수면을 깎아먹는 것도 모자라, 생뚱한 질문으로 나를 웃기는 그 아이. 하지만 젊은 엄마는 얼마나 또 냉정했던가.

"이원이 아니고 이, 혼, 이혼이야!"

"하여간 말이야. 엄마, 나 애기 키우기가 두려워. 아이들은 엄마를 못살게 하잖아. "
정말이지, 이 아이의 일상 언어는 연극적이다.

"엄마가 니 애기 낳으면 키워줄께. 외할머니가 외삼촌네 쌍둥이 키우듯이 말이야."

좋다, 좋다.
일곱살 작은 아이는 금방 좋아라고 박수까지 쳐댔던가.
꼭 두살 되면 그림책을 읽어주라고 주문까지 했던가.

아이들은 자기 세계에 맞게 잘도 이해를 한다. 받아들인다.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가 필요해~~~~.

자두의 노래를 끝으로 남은 음료수를 뒤집어 혀에 대고 쩝쩝거리며 노래방 문을 열고 나온다.
강아지 아롱이가 고생했다. 설사 겨우 나았는데, 고막이나 성할려나.
강변노래 연습장 계단을 지나, 성주로 가는 이정표 붙은 작은 도로를 건너서,
북경반점앞을 지나, 과일가게를 돌아, 빵집유리문으로 빵을 사갈까 어쩔까하다
남아있는 군것질거리를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뭉텅하니 서있는 야산 하나를 삽질하고 포 뜬 자리에 서향으로 줄줄이 서있는 아파트.
산등성이였을 오르막을 오르는데,
맞은편 인도에 벚나무 몇그루!

화사한 꽃그늘 밑에서 딸들 사진이라도 박아준다는 것이,
그나마 까먹고 지나는구나.
휘청휘청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오른다. 세 모녀가 사는 집은 아파트 맨 꼭대기 101동이니까.
아롱이 쉬를 누이고.

"야, 꿈 한가지씩 말해봐봐"

엄마가 자주 고문에 가깝에 점검하는 메뉴.

"엄마랑 아빠랑....안싸우고 함께 사는 것!"
퍼머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큰아이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눈까지 흘겨가며 엄마를 떠본다.
대답 뻔히 알면서.

"야, 야. 현실가능한 꿈을 가져라. 그것 말고!"

"히히히"
"킬킬"

세 모녀는 깔깔댄다. 이제는 우습단다. 나도 우습다.

"엄마, 나는 있잖아. 꽃이 가득한 꽃밭에서 막 뛰어노는게 내 꿈이야."
원더풀, 윤님!

"사실은.....엄마, 나는 강아지 백마리 키워봤으면 좋겠어."
굿, 예님!

좋다, 좋아.
까짓거.
강아지 백마리에 꽃밭 가득 뛰어다니는,
너희들 그 꿈을 엄마가 접수 못하랴.
장하기도 하지, 내 딸들. 훌륭한 꿈을 꾸시다니. 계단을 오르는 슬리퍼에 힘을 준다.

"엄마, 엄마는 다른 남자랑 사랑 안해?"

작은 아이는 늘상 엄마 뒷골을 때린다. 허허로움이 가슴에서 올라와 허허실실 입가로 번진다.
숙제도 않고 쓰러져자는 큰아이 바지를 벗기니, 세상에나.
엉덩이가 벌써 이렇게 여물었나. 하긴, 바쁠때는 엄마 팬티 입고 학교도 가는데.
벌써 책 끼고 돌침대 위에 누운 작은 아이는 그 작은 입을 한시도 가만 놀리지 않고 종알거리는데.

암탉의 난소 그림을 보며 병아리가 만들어지는 뭉실뭉실한 노른자를 읽다 법기 이야기까지 나왔나. 잔다. 잘 잔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문다.
공선옥의 소설, 그 다음이 별로 궁금치가 않다.
내 이야기가 훨씬 재밌다.

벚꽃이 며칠은 더 가려나.














무지강

2003.04.09 00:00:00
*.155.246.137

...이런 글 올리면...될까, 안될까...^^
요청 있으면 후딱 지울께여~~~.

신상범

2003.04.09 00:00:00
*.155.246.137

무슨... 너무 재밌습니다. 어머니!
아예 연재하면 좋겠다!

기범...모

2003.04.16 00:00:00
*.155.246.137

무지강님~~~저두 담 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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