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비가 다녀갔다. 새벽이었다.

이른 아침 멎었지만 해는 나지 않고 바람이 조금 불고 있었다.

학교 아저씨는 가마솥방에서 난로를 설치 중.

가마솥방 앞 꽃밭의 마른 잎들을 정리 중.


그제 심은 느티나무에 어제는 물을 주며 삽질을 했고,

오늘은 그 그늘 아래의 장승 둘을 받친 돌무데기를 정리하다.

여름 가고 가을 깊어가는 사이 풀은 내 세상이라며 한껏 무성했다.

풀을 뽑고, 툭툭 던져두었던 돌들을 들어내

찬찬히 둥글게 쌓아올렸다.

밭가에서 나오는 돌마다 그 안으로 던지면 돌무더기가 모양을 갖춰갈 테다.

그런 순간 사는 것 같다.

없던 것이 눈앞에 덩어리감을 가지고 나타나서도 그럴 수 있겠지만

피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휘돌아나가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두어 시간 힘을 쏟고 일어선다.


“아끼다 임자 만났네요.”

이웃 도시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금해샘이

중국에서 교환 온 학생의 부모가 한 선물이라고

다구가 같이 있는 차가 든 상자를 보내왔다.

내게 쓰이지 않는다고 쉬 남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닌 줄 안다.

좋은 사람을 알고 나면 사는 일에 힘이 난다.

그런 사람 아는 것만도 비할 데 없는 기쁨이었는 걸...


학교 본관 비닐을 칠 때가 되었다.

작년에 쓰고 걷어둔 것들을 꺼낸다.

개켜져 있기는 하나 씻겨져 있지는 않았다.

바로 쓸 수 있도록 늘 앞을 그리 정리해두자 하지만

너른 살림에서 다른 일을 하다 그만 밀리기 쉽고, 그러다 잊혀버리기도.

물꼬를 비웠던 한 해, 돌아와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일들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여러 건이었다.

새로 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플라스틱 환경오염이 어디 하루이틀이고 국소부위의 문제더냐.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쓸 수 있을 때까지 써야 할 것.

바깥수돗가에 다 꺼내 쌓아둔다.

볕 좋은 날 해야 마르기도 금세고

한 번에 다 일하기도 좋을.

그만 또 잊히지 않아야 할 텐데.


밀린 기록들을 정리한다.

02시가 넘어간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1494 3월 빈들 여는 날, 2024. 3.29.쇠날. 갬 옥영경 2024-04-18 553
1493 2023 물꼬 연어의 날; Homecoming Day(6.24~25) 갈무리글 옥영경 2023-07-26 553
1492 2021. 7.19.달날. 맑음 옥영경 2021-08-09 553
1491 2021 물꼬 연어의 날; Homecoming Day(6.26~27) 갈무리글 옥영경 2021-07-23 553
1490 2019. 8.23.쇠날. 맑음 / 우리는 아이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가? 옥영경 2019-10-08 553
1489 2023.10.23.달날. 맑음 옥영경 2023-11-07 552
1488 10월 빈들모임 여는 날, 2019.10.26.흙날. 맑음 옥영경 2019-12-10 552
1487 171계자 닷샛날, 2023. 1.12.나무날. 맑음, 늦은 밤 몇 방울 지나던 비가 굵어지는 / 멧돼지골 옥영경 2023-01-16 552
1486 2023.11.25.흙날. 맑음 / 김장 첫날 옥영경 2023-12-05 551
1485 2023. 8.14.달날. 맑음 / 노력은 우리 어른들이나 좀 할 것 옥영경 2023-08-16 551
1484 2022. 1.18.불날. 흐리다 해 / 학습의 밑절미 옥영경 2022-01-27 551
1483 2019. 7.10.물날. 비, 여러 날 변죽만 울리더니 옥영경 2019-08-17 551
1482 2023. 9. 4.달날. 맑음 옥영경 2023-09-15 549
1481 2022. 4. 6.물날. 맑음 / 설악산 아래·6 옥영경 2022-05-03 549
1480 2020.11.11.물날. 맑음 / 흙벽에 목천 붙이다 옥영경 2020-12-15 549
1479 173계자 사흗날, 2024. 1. 9.불날. 흐림 옥영경 2024-01-11 548
1478 ‘2022 연어의 날’ 닫는 날, 2022.6.26.해날. 오려다 되돌아간 비 옥영경 2022-07-13 547
1477 2019.11.11.달날. 맑고 바람 많은 / 명상이 무엇이냐 물어왔다 옥영경 2019-12-30 547
1476 2019. 9. 5.나무날. 소나기라 할 만치 / 가을학기 여는 날 옥영경 2019-10-16 547
1475 2019. 6.19.물날. 는개비로 시작한 아침, 그리고 갠 옥영경 2019-08-07 547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