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삽질 하시는군요!!"
<서른 즈음에 떠난 여행15> - 자유학교 '물꼬' 이야기2


이 땅에 나보다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도 많건만, 대학을 다니던 시절, 적지 않은 시간을 건설 공사현장에서 ‘노가다’ 하며 보내야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가난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많았다.

지금 하고 있는 도보여행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꿈이었다. 난 대학시절에 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대학입학 한 달만에 무참히 깨져버렸다.

대학은 안정적으로 등록금을 대줄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부모님이 있고, 즐길 수 있는 용돈이 충분한 학생들에게는 충분히 낭만적일 수 있다. 그러나 등록금을 벌기 위해 여름방학이면 작렬하는 태양 아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땀으로 샤워를 하듯 일하고, 겨울방학이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추위 속에서 망치질을 해야 했던 나에게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아주 먼 이야기였다.

게다가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 제적까지 당한 내게, 방학을 이용한 도보여행은 그야말로 이룰 수 없는 달콤한 꿈에 불과했다. 친구들이 유럽으로,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날 때 작업복을 챙겨들고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향했던 내 현실이 솔직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어렸던 나는 그런 내 상황을 많이 한탄했었고, 부유한 가정의 친구들을 많이도 부러워했다. 정말이지 그 때 가장 부러웠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등록금을 집에서 대주는, 등록금의 부담감에서 자유로운 친구들이었다.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만 하루 하루가 유지되었던 나의 쟁취 대상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누렸던 모든 것이었다. 모진 고생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노동이야말로 역사를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라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전환의 이론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지만, 정작 난 노동이 싫었다. 노동은 이론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힘들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고, 노동하는 내가 그다지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대신 난 지식과 지식인을 좋아했다. 허름한 학생회실에서 독한 소주를 마시며,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세상의 진리와 수많은 이론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선배의 모습이 좋았고, 존경했다.

현란한 용어를 사용하며 거침없이 철학, 역사, 이데올로기를 논하던 사람들을 선망했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난 지식인처럼, 엘리트처럼 보이려는 속물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20대의 소중한 시간을 소비했다.

그런 지식인 선호의 내 취향은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내 스스로 지식인이 될 수 없다는 자각도 작용했겠지만, 현란한 지식만큼이나 화려하게 자신의 신념을 바꾸며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거침없는 지식들의 변화 무쌍한 삶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었다. 세상은 지식인들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에 회의가 들었고, 자신들이 세상을 지도해야 한다고 짐짓 믿고 있는 지식인들이 더이상 반갑지 않았다.

그에 반해 노동하는 사람들, 몸을 굴려, 그야말로 제 몸뚱이 하나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는 커져갔다. 말을 하고 책을 읽는 습관에 앞서 노동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의 삶에 많은 신뢰가 갔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머리 좋은 게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게 손 좋은 것만 못하며, 손 좋은 게 발 좋은 것만 못하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공동체 마을 자유학교 ‘물꼬’에서 열흘을 보내고 오늘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공동체 마을, 대안학교 등의 모든 것들은 내게 생소했고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열흘 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강렬하게 남는 것은 바로 노동하는 사람들과 노동하는 손의 아름다움이다.

물꼬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사람들은 누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와서는, 누군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노동을 한다. 서울에서 온 사람도, 경북에서 온 농사꾼도 모두 웃으며 열심히 땀을 흘렸다. 그들은 그렇게 '물꼬'에서 하루 이틀씩 땀을 흘리고 웃으며 다시 떠났다.

이곳 저곳 손을 볼 곳도, 만들 것도 많은 '물꼬'는 모든 것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결한다. 공사 업체에게 맡기면 우리가 하는 것보다 빠르고 깔끔하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서툴면 서툰대로 가족과 ‘품앗이 일꾼’의 노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절대로 서둘지 않는다.

톱질을 잘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잘 하는 사람은 열심히 망치질을 한다.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노동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던 나도 어느새 즐겁게 노동하고 있었다. '시가 내게로 왔다'라고 노래한 시인처럼, 노동이 내게로 왔던 시간이었다.

천천히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비닐하우스가 완성되고, 도서관이 완성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슴 뿌듯함이란 진실한 노동이 주는 선물이었다.

소위 “삽질하고 있네”라는 말은 노동을 천시하는 우리 문화에서 만들어낸 욕이다. 물꼬에서 난 망치질, 톱질을 했고, 욕이 되어버린 그 삽질을 했다. 그리고 어려운 용어 섞어가며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보다, 살집을 잘하고 망치질을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내가 새삼스레 확인 한 것은, 머리보다는 몸을 사용하는 노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진정성과 성실성이다. 더 이상, “삽질하고 있네”라는 돼먹지 못한 말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비아냥대신, “오, 삽질하시는 군요!!”라는 감탄과 존경의 말을 노동하는 사람에게 헌정할 생각이다.

난 가끔 내가 너무 큰 친절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건 아닌가하고 의심하곤 한다. 친절을 베푸는 것에 서툰 난 그만큼 친절을 받는 것에도 서툴다. 22살 때부터 14년 동안 자유학교 물꼬를 준비했다는 옥영경 교장선생님은 그동안 언론에서 보도된 것 그대로 정말 대단한 ‘철의 여인’이다.

옥영경 선생님의 대단함이란 굳은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속이 쓰린 내게 뜸을 손수 뜸을 놔주고 아픈 내 무릎에 손수 파스를 붙여주는 세심한 배려에서 나오는 듯 했다. 물꼬를 떠나던 날 아침 선생님은 교무실에 내가 가져갈 것을 챙겨놓았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교무실 책상 위에는 미숫가루 한 봉지, 은행 한 봉지, 아픈 무릎에 붙일 파스, 책 한권, 숟가락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가방에 넣으면서 난 자꾸만 젖어오는 눈가를 연신 손으로 닦아냈다.

날 불량스님이라 불렀던 '물꼬'의 아이들과 여러 선생님들은, 작은 시골학교에서 내리던 눈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하얗게 내리는 송이 눈을 좋아하는 것처럼 난 오랫동안 그들을 좋아할 것 같다. 그들은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친절을 베푸는 것에 전혀 서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갈 길이 참 멀다. 어쩌면 올해 안에 이 여행을 끝마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옥영경 선생님의 말처럼, 사람은 누려야 할 것은 마음껏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친절과 알지 못한 세상을 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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