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설샘과 미루샘 혼례 주례사

조회 수 1089 추천 수 0 2009.02.09 21:01:00

지난 주 흙날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있었던
유설샘 미루샘의 혼례 주례사입니다.
몇 분이 보내달라 부탁하셔서 여기 올려놓습니다.

* 주례사가 가난하여
두 사람이 살아온 날을 담은 슬라이드로 앞을 열었답니다.
하니 슬라이드를 더해 주례사가 되는 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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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례 사

옥 영 경


저는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다보면, 한 아이가 자라는데 바람 이슬 햇볕 수많은 손길, 그리고 거룩한 기운들 틈에 저도 동참하고 있다 싶으면, 그 일이 너무나 귀해서 가슴이 벅찹니다. 오늘 우리가 두 사람의 생의 중요한 자리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먼저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직 세상 경험이 하찮은 제가 주례를 맡은 것은 물론 두 사람과 맺은 남다른 인연 때문입니다. 고아원 아이들을 비롯해 여러 아이들이 모인 곳에 두 사람이 기꺼이 바쁜 시간을 쪼개 자원봉사를 오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맞습니다. 또, 흔히 주례를 보는 어르신들에 나이가 미치지도 못합니다. 사람이 제 설 자리를 알아야 하거늘 어찌 어찌 하다 보니 주례를 보게 되었다고 다른 분들한테 전하니, 주례를 맡은 사람도 맡은 사람이지만 주례를 부탁한 신랑각시가 더 대단하네 그러셨습니다. 이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대학을 나온 이들에게 지도교수가 왜 없을 것이며 존경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지요? 그런데도 저를 주례로 세운 것은 앞서 두 사람의 서약문에서도 말했듯 이들이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살겠다’는 뜻의 한 예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하지 않지요. 두 사람이 좋은 도반으로 정말 필요한 일에 힘을 쏟고, ‘생-각-한 대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저도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습니다. 지난 겨울 며칠 동안의 어떤 명상수련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모두가 살아오며 겪은 아픔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틀째 되던 한 순간 사람들이 모두 절 보았습니다. 저만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워 그랬을까요, 아니면 정말 절망한 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그때까지 사실 저조차도 할 말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알아버렸지요. 저라고 어찌 곡진한 사연 하나쯤 없었겠는지요. 외려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때 남편을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한 인간을 얼마나 치유하고 건강하게 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남편은 때로 저보다 저를 더 많이 이해해주어 흔들릴 때마다 제 자신의 길을 가도록 격려해줍니다.
예, 저는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온전하게 서로에게 ‘편’이 돼주길 바랍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온전히 나를 아껴준다 싶으면 우리는 크게 어긋지지 않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그 충만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도 살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얘기가 있지요. 부부싸움이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반영한다 합니다. 유치원교사인 아내를 둔 남편이 술에 곤죽이 되어 들어왔다 합니다.
“술 마시라 그랬어요, 마시지 말라 그랬어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러면, 만약 술자리에 가면 많이 마시라 그랬어요, 조금만 마시라 그랬어요?”
“조금만...”
“앞으로 술 마실 거예요, 안 마실 거예요?”
“안 마셔, 안 마셔.”
“마시면 죽~어~요.”

유설님과 미루님도 그리 싸울 걸요. 저는 두 사람의 성품을 잘 압니다. 퍽 온화하고 보기 드물게 지혜로운 이들이지요. 사는 일이 어찌 오늘처럼 그렇게 가슴 떨리기만 하겠는지요. 하지만 서로에게 건조해질 때도 윤기를 더하며 살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결이 고운 이들을 지켜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잘 살아서 이렇게 선한 이들이 아무쪼록 무탈하도록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고 뚜벅뚜벅 자신들의 삶을 걸어가는 두 사람을 같이 오래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랑 미루님 각시 유설님,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함께 하여 귀한 자리를 만들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9.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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