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자유학교에 함께 했던 품앗이일꾼이 쓴 갈무리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백네 번째 계절 자유학교 방문기

정지영(품앗이일꾼)


"물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물꼬를 자꾸만 규정하데요."

처음 대해리 물꼬를 찾아 갈 때는 사실 좀 귀찮다란 느낌이 강했다. 날도 더운데 농사일도
해야 하고, 어색한 사람들과의 부딪침도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게도
이러한 모든 근심들이 영동역을 내려 물꼬를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하나하나 무참히 깨어
졌다. 대해리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들어선 순간까지 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포도밭이며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수풀과 산들이 나의 근심을 덜어내 주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야!
우울하다가도 이곳에 오면 행복해 지겠다!'였다.
택시가 물꼬를 들어서는 순간에도 난 물꼬인지 몰랐는데 입구에 '자유학교 물꼬'란 글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물꼬를 처음보고 든 생각은 와.. 학교 참 낡았다. 당장이라도 폭삭 주저
앉을 것 같은 느낌. 파리 떼도 어찌나 많은지. 아~~ 여기서 며칠을 어찌 보낼까. 틀림없이
모기도 엄청 많을 건데…. 모기들이 내 피 무지 좋아하는데…. 그런 생각에 잠시 젖어 있다
가 어느 선생님의 인사 소리에 깨어났다.

파리가 군무를 추는 식당에 앉아 이젠 잘 쓰지도 않는 스댕 그릇에 밥을 먹고 잠시 고래방
(강당) 청소를 돕고 나니 어느덧 대해리는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둠방에 둘러 앉아 교장
선생님이 옥쌤(이 곳에서는 선생님을 쌤이라 부르는데, 푸근한 어감도 있지만, 선생님보다
덜 권위적이고 짧은 단어가 좋아서라고 하네요.)의 인사로 '교사 미리모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을 타고 왔나',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이곳에 왜 왔나', 세 번째 질문
은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배워가고 싶은가'였던 것 같다. 이런 질문은 '거울보기'란 이름
으로 한명씩 돌아가며 거울에 자신을 비추듯 자신의 내면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떤 이는 자신의 젊은 날이 이곳에 있어서 다시 왔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곳
에 오면 자신이 필요한 존재여서 행복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 곳 졸업생인데 '계자'가 있
다는 말에 당연히 와야지란 생각에 왔다고 하고, 어떤 이는 답사 차원에서 왔다고 하고. 난
캠프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왔다고 한다. 모두가 다양한 이유와 생각으로 이곳에 모였지만,
내 목적의 벽을 없애야 물꼬를 느끼겠구나였다. 옥쌤이 그러신다. "목적한 만큼 물꼬가 보
일 겁니다. 물꼬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물꼬를 규정하고 물꼬를 본
데요"라고 말이다. 바로 나에게 하는 말처럼 다가왔다.
깊은 밤 물꼬의 가마솥방(주방)에서는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다. 아무리 먹어도 다음날 숙
취가 없다는 그 곳의 막걸리를 먹으며 이야기를 꼬리의 꼬리를 물고 어느덧 새벽을 훌쩍
넘겼건만 도통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물꼬의 첫날밤이었다.

첫째 날

이른 아침 현관의 징소리가 울리면서 물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주섬주섬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고래방에 모여든다. 고요한 아침 명상도 하고 몸도
풀어주고 하루 일을 정리도 하며 물꼬의 해 건지기는 마무리 한다. 잠시 후 시골아줌마나
씀직한 커다란 모자와 수건들을 둘러쓰고 물꼬의 트럭에 실려 달꼬(포도밭)에 갔다. 구불
구불 비탈길을 올라 산의 중턱쯤 올랐을 때 대해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달골이 자리하고 있
었다.
포도밭 구석에 놓인 돌들도 치우고 가지도 잘라주고 있을 쯤 또 한 번의 징소리가 울리면
서 '아침밥' 먹으러 물꼬로 돌아온다. 아침을 먹은 후에는 간식 등을 챙겨 또 달골에 올라갔
다. 원두막에 올라 잠시 대해리 바람도 맞고, 하던 일을 마무리 한 후 아이들의 도착 시간
이 되어 서둘러 내려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물꼬는 주먹만 한 꼬마부터 제법 커다란 아이까지 조잘조잘 뛰
어다니며 외치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때 건지기(식사)를 할 때 내 앞에 강화도에서 온 7살
재욱이란 꼬마가 앉았는데, 자기는 오기 싫었는데 아빠가 이미 예약도 했고 돈도 지불했으
니 가라고 해서 왔단다. 그런데 와 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고…. 잠시 한숨도 쉬고, 찌푸리
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다양한 얼굴을 보며 갑자기 공룡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룡 아세
요. 전 공룡을 무지 좋아해요. 그런데 말이예요. 공룡은요…." 그 끊임없는 공룡 이름과 '쥬
라기 공원' 이야기를 하며 밥도 잊고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눈빛을 날린다. "재미있죠."라
며….

때 건지기를 마치고 아이들과 물꼬 탐색에 나섰다.
"와! 여기 염소가 네 마리나 있어. 뿔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널 받을지도 모르니까. 여
기 봐. 여긴 민들레 홀씨도 무지 많다."
아이들에게 민들레 홀씨를 하나씩 꺾어 주며 훅훅 불고 있을 무렵. 옥쌤의 아들이자 계자
에 참가 중인 류옥하다군이 일침을 날린다.
"쌤. 그렇게 식물을 함부로 꺾으면 어떻게요. 그리고 그런 것은 자연적으로 날아가야지 입
으로 부는 게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할 말이 없데요. 그러더니 자기가 알려주겠단다. 잠시 후 류옥하다군의 물꼬 강의가 시작되
었다.
"다쳤을 때는 약을 바르는 게 아냐. 이렇게 이끼초를 뜯어서 잘게 잘라 돌로 빻아서 즙을
내서 붙이고, 질경이 열매는 먹어봤나. 이렇게 먹는 거야." 시범도 하고,
"이곳에는 고양이 무덤이 있어 그 전설은 아나. 여기 쫄랑이(개 이름)는 물꼬의 개들 중 최
고 연장자로서 산개와 만나 강아지를 낳고 그 강아지는…"
물꼬의 동물 역사를 들려주기도 하고.. 그 끝도 없는 조잘거림에 아이들은 감탄을 터트리며
나도 나도 하며 질경이 씨앗도 먹고 모기물린 곳에 이끼초 즙도 바르고….

더운 날이어서 아이들과 물꼬의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하고 다이빙도 하고 번지점프까지 했
다. 물한계곡의 얕은 길목을 잡아 물꼬의 수영장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옷을 홀랑 벗겠
다는 아이, 물놀이 중 놀라 우는 아이, 올챙이를 잡겠다고 열심히 물을 보는 아이, 다양하
게 울리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계곡을 울린다.
잠시 후 아이들이 진정 될 즈음 그림놀이 수업이 진행되었다. 당황스럽게도 그 수업을 나
와 조금경애쌤이 진행하게 되었다. 재료는 지난겨울 찬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에 달았던 비
닐에 아크릴 물감과 매직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그리는 수업이었다. 단 하나
도 더 이상 쓸 곳이 없을 때까지 사용한다는 물꼬의 정신이 그대로 묻어나는 순간이지 않
나 싶다. 아이들은 똥패와 오줌패로 나뉘었다. 나는 오줌패 친구들과 둘러앉아 어떤 이야기
를 만들까를 이야기 했는데, 크게 '귀신'과 '파리'가 주제로 정해져 우리 패는 둘로 나뉘었
다. 우리 패는 '저주받은 종이인형'이 제목인데 그림을 그리다 사고가 터졌다. 지선이란 아
이가 영빈이란 아이의 그림에 말도 없이 턱하니 색칠을 해 버린 것이다. 영빈이는 다른 색
을 칠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영빈이가 좀 험한 말을 하고, 지선이의 사촌오빠인 준형이는
동생이 몰리자 화를 내고, 그러다 속이 상한 영빈이는 나가 버렸다. 잠시 수업을 다른 쌤에
게 부탁하고 영빈이를 찾아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속이 상한 영빈이는 끝내 눈
물을 보였다. 지선이가 잘못은 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내 맘이
무척 속상하고, 지금은 놀이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차근차근 이야기 한다. 난 영
빈이와 대화를 하며 놀랐다. 왜냐면 나의 첫 느낌은 영빈이가 통제가 되지 않는 막무가내
의 아이였는데.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표현되지 않아서이지 우리
아이들이 주변의 상황이나 말들을 누구보다 더 빨리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계기였다. 영빈이와 이야기 한 후 고래방으로 오면서 잠시 아이
들에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을 맞으면서 너무 준비 없이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그림놀이'를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

저녁 때 건지기를 마치고 한데모임(전체모임) 시간을 가졌다. 하루 종일 있었던 일도 이야
기 하고 새로이 만들어 진 것이 있으면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정할 것이 있으면 함
께 의견을 나누는 전체 모임이다. 오늘은 그림놀이를 펼쳐 보이는 시간이었다. 똥패는 '깨
끗한 지구'란 이름으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오줌패는 '파리의 고통'과 '저주받은 종이인형'
을 발표하였다. 발표도 신난다. 누군가 이야기하면 꼬마들이 나와서 졸졸 따라다니며 "그렇
지, 이렇게 된 거예요."하며 발표자를 따라 하기도 하고, 발표인지 웃음바다인지 모두가 한
바탕 웃고 나면 하루의 소감을 이야기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좋았어요. 재미났어요."라
고 말했다. 이유도 없다. 어쩜 그게 맞는 말일 거라 생각했다.

한데모임을 마치고 고래방으로 이동해서 대동놀이를 했다. 정말 웃긴 것은 아이들이 고래
방에 있기만 하는데도, 그렇게 신나하더라는 거다. 뛰고 소리 지르고 깔깔대는 소리에 서로
우습다고 뒹굴고 말이다. 그런 모습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어쩜 물꼬
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여서 더 물꼬를 오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
다!', '여우야 여우야', '릴레이 달리기', '음악에 맞춰 춤추기' 등을 하며 신나게 놀았다. 컴
퓨터가 없어도 장난감이 없어도 온 몸이 흠뻑 땀으로 젖도록 신나게 노는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땀투성이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샤워장으로 이동하고 잠시 후 물꼬는 다시금 깊은 밤
의 정적에 싸였다. 모둠방에서는 나지막한 쌤들의 동화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은 동화에
취해 스스륵 눈을 감는다. 그 사이 쌤들은 휴식도 취하고 씻기도 한다. 잠시 후 모두가 잠
들고 나면 쌤들은 가마솥방에 모여 하루재기(평가)를 한다. 정말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돌
아가면서 하루 동안 했던 일과 느낌들을 말하는데 이것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또 말하고 거기에 기록까지 하여야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도통 할 말이 없어 난
처하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물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하
루재기를 마치고 나니 새벽 1시, 아 이제 자나보다 싶었지만 그것은 오산, 이제부터는 새로
온 '품앗이(자원봉사자)'들의 살아온 이야기 시간이 있는데 여기의 관례라고 한다. 5분의
휴식 후 다시 모였다. 이미 졸음이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의 품앗이 쌤
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도 하고, 아∼
난 그 나이에 뭐했지란 생각도 하고, 이 사람이 보기하고는 또 다른 매력이 있구나 생각도
하고. 그렇게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물꼬는 조용히 하루를 정리했다.

둘째날

이 날은 좀 바쁜 날이었다. 기간이 짧다 보니 여러 가지 수업이 집중된 날이기 때문이다.
어른모임을 마치고 오늘은 논으로 갔다. 물꼬에서는 논농사와 달꼬에 포도농사를 짓고 있
었다. 농사의 기본 방침을 무농약 또는 저농약으로 정하고 논에는 우렁이 농법을 하고 계
셨다. 난 우렁이가 알에서 나오는지도 몰랐지만, 우렁이의 알이 빨간 꽃처럼 생긴 것도 처
음 알았다. 맨발로 들어간 논의 진흙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논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도 나
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 냄새가 흙이 썩어가는 냄새라고 한다. 물꼬의 논은 농약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냄새가 적은 것이라고 경훈쌤이 말씀해 주셨다. 피 뽑는 작업을 했는데 빠
지고 넘어져 벼를 부러뜨리기도 해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자잘한 피를 뽑자니 일이 더디
었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

징소리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잠시 잠을 잔다는 것이 눈을 떠보니 세상에 벌써 점심 때 건지
기 시간이었다. 당황해서 여기저기 사람들을 찾았는데 도통 보이지는 않고, 논에도 아무도
없고, 농사일을 주로 보시는 삼촌인 영철쌤(젊은 할아버지라고도 부름)도 같이 일하다 잠
깐 동네사람과 이야기 한 사이 사람들이 없어졌다며 함께 찾다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날이 더운 관계로 잠시 대해리 쉼터에서 쉬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나고 오전에는 '우리가락'시간이었는데 악기도 두드려보고, 민요도 배우
고, 대동놀이도 배우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 열린 교실도 했는데 열린 교실은 어른들의 능
력을 아이들과 나누는 수업으로 실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배우는 것이다. 한땀두땀(바느질).
뚝딱뚝딱(망치질). 둥구미 엮기(바구니 만들기), 이야기 책 만들기. 맨 끝에 다 좋다(자유
수업) 의 수업에 아이들이 선택해서 듣는 수업이다. 그리고 바로 보글보글이 시작되었는데
이건 아이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서로에게 대접하는 수업이다. 보글보글은 호떡, 떡볶
이. 김치/멸치 알밥, 삼색 수제비, 화채와 경단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열린 교실처럼 만들고
싶은 요리를 선택해서 만든다. 난 김치랑 멸치 알밥을 함께 만들었는데 음, 진짜로 맛있었
다. 그렇게 총 끼니 중에 한 끼니는 아이들이 만들어서 먹는다. 아이들의 말을 빌리면 "만
드는 동안 무척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 완성해서 함께 먹으니까 너무 맛있어요."란다.
누가 하나 빠짐없이 고사리 손으로 칼질도 하고, 뭉쳐도 보고, 요리순서를 꼼꼼히 적어 집
에서 꼭 해보겠다는 아이도 있다.
그렇게 점심 때 건지기를 마치고 잠시 쉰 후 아이들은 숲 탐험에 나섰다. 긴 옷과 양말 모
자를 꼼꼼히 챙기고, 물론 지팡이도 챙겨서 모여든다. 누군 긴 옷이 싫다고 안 입고, 누군
없다고 안 입고, 없는 아이는 물꼬의 옷 방에서 옷을 찾아 입히고, 싫은 아이는 숲 탐험에
대해 설명하며 벌레며 뱀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며 입히고…. 긴 시간 후 아이들은 세 모둠
으로 나뉘어 길도 없는 우거진 숲으로 사라졌다. 그 사이 농사일패는 논으로 다시 피를 뽑
으러 나섰다. 오후의 농사일에는 즐거움이 하나 있다. 막걸리가 새참으로 나오는 것이다.
중간에 대해리 쉼터에 둘러앉아 수박이며 식혜, 막걸리를 먹는 기분은 먹어봐야 안다.
아이들이 돌아오고 저녁 때 건지기까지 마친 후 한데모임을 했다. 바삐 보낸 하루여서인지 할 말도 많고, 보여
줄 것도 많다. 열린 교실에서 만든 우체통, 오재미와 머리끈, 이야기 책, 바구니와 곤충들, 그림들 까지. 그리
고 보글보글 이야기, 숲 탐험에서 본 뱀이며 곤충들, 다친 이야기, 길을 잃어 힘들었다는 이야기 등 쉴 사이도
없이 쏟아 놓는다.

고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작은오빠와 구름 한 조각'이란 동화를 보았다. 어려운 가정에 아
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떠나 버리고 어린 삼남매가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고래방에
커다란 천이 내려지고 음악도 켜지고, 앞에는 옥쌤이 이야기를 읽어 주셨다. 아이들이 지루
해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모두가 소리 없이 지켜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금은 느리
게 조금은 불편하게 지내는 물꼬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
았다.
잠시 후 대동놀이인 강강수월래가 시작되었다. 그냥 손잡고 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걷
기' '뛰기 ''남생아 남생아' '고사리 꺾기' '청어 엮기' '멍석말기' '손치기 발치기' '개고리 타
령' '대문열기'까지 처음 접하는 긴 놀이였다. 그 사이 아이들은 땀으로 흠뻑 젖고, 창문 너
머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지고 감자가 구워지고 있었다. 놀이를 마치고 모닥불에 모둠별
로 둘러 앉았다. 쌤들도 삼 모둠으로 구성되어 모둠별로 노래 시합을 했다. 동요도 부르
고, 자유학교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 한명 씩 하루 이야기를 나누었다. 옥쌤은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시며 "누구야 넌 하루가 어땠니?" 하신다. 이것도 참 신기했다. 단 한번 실수도
없이 모든 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말이다. 다른 쌤들의 말에 의
하면 그래도 이번에는 19명이지만 100명이 참가해도 모두 이름을 외우신다고 한다. 그만
큼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감자가 익어갈 즈음 영철쌤과 경
훈쌤이 감자를 꺼내 한명씩 나누어 주셨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축제의 장인데 '감자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감자싸움은 물꼬의 자랑으로 탄 감자에서 묻어나는 까만 그으름을 사람
들에게 묻히며 다니는 것이다. 감자싸움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묻히는 것이 장땡이다. 여기
저기 난리다. 더럽다고 울기도 하고, 그러다 그래 그럼 너도 한번하며 달려들기도 하고, 시
꺼먼 그으름 투성인 얼굴을 마주하며 신나게 웃기도 하고. 모닥불이 사그라질 즈음, 아이들
은 옷을 챙겨들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쌤들의 하루재기가 시작 된 것은 12시 즈음. 긴 하루여서 지치기도 하고, 더운 가마솥방이
었지만, 도란도란 나누는 마지막에 대한 아쉬움과 물꼬에서의 느낌들, 아이들과의 시간들
은 모두의 입가에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연신 웃음은 터지고. 아쉬움 반 피곤함 반으로 잠
자리에 들자마자 모두가 잠들어 버렸다.

셋째날

이날은 주로 청소와 갈무리 작업을 했다. 구석구석 먼지도 털어내고, 아이들 짐정리도 시키
고, 주인 없는 물건들도 찾아주고, 모둠별로 둘러앉아 갈무리 글도 쓰고. 글집(자료집)에
물꼬의 계절자유학교를 졸업했다는 도장(이것이 물꼬의 마지막 과정이다.)도 옥쌤이 한명
한명에게 꾹꾹 눌러 찍어주셨다. 민형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마지막 날 글집을 잃어버려서
다른 글집에 도장을 받았는데, 서운해서 울기도 했다. 이 도장이 아주 중요한데. 첫날 옥쌤
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물꼬에 보물이 있는데, 운동장 입구 쪽에 있는 소나무 밑에 최첨단
금고가 숨겨져 있어서 교무실에서 단추를 누르면 소나무가 갈라지면서 금고가 올라온다고
하셨다. 그 속에 바로 도장이 숨겨져 있다고. 이 이야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
되었고, 실제로 그걸 옥쌤에게 묻는 어린 친구도 있었다.

처음에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고 가려 했는데, 시간이 넉넉해서 마지막으로 가마솥방에
둘러앉아 점심으로 준비해 주신 김밥을 먹었다. 김치와 버섯만이 들어간 것 같은데 그렇게
맛난 김밥은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모두가 연신 "맛있다"를 말하며 밥 한 톨 남기지 않
고 먹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영동역으로 출발할 때 모두가 즐거웠던 것만큼 아쉬움도 컸다.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는 친구들부터 학교에 남으시는 분들까지 정이 넘치는 이별 속에서 버스는 영
동으로 출발했다. 역에서 내릴 즈음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한바탕 소낙비 세례
가 있었다. 마중 나오신 부모님께 아이들은 물꼬 자랑이 한창이고, 그 속에서 물꼬 장터가
열렸다. 아이들의 물건을 찾아주는 장터인 것이다. 이곳에서도 주인을 찾지 못하면 그 물건
은 물꼬의 창고에 들어가 다음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모두가 흩어져 집으로 향하고 뒤에 남은 쌤들은 근처 찻집에서 갈무리를 하였다. 아이들이
작성한 글을 한장 한장 넘겨보며 다시금 그 때를 회상하기도 하고, 이번 계절학교를 보내
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갈무리에 많은 쌤들이 참가하지 못해 모두 아쉬
워했다. 갈무리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 물꼬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생각해 보았
다.

물꼬를 통해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곳
처음 물꼬 갔을 때와 물꼬를 나올 때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난 정확히 무엇을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게 정확한 것이 있다면 물꼬를 다시 한 번 꼭 가야겠다는 것이다. 물
꼬는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관계로 끝나지 않고 애
정과 여운이 남고, 추억으로 머물지 않고 과제로 남았다.

마지막 날 돌아오는 길 옥쌤이 조용히 말씀하신다. "아주 가끔씩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누
구나 친절하게 배려해 줄 수 있죠. 그러나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하며 늘 웃음을 보여 주기
는 쉽지 않죠. 그러한 친절이 일회성이 아닌 자신의 삶에 마인드로 만드는 것이 나와 우리
의 과제로 남겨져 있는 것 같네요"라고.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던 말씀이
지만 그 말은 누구를 막론하고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던져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잘 나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높은 곳에 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집단속에 있다. 자연도 사람도 짐승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쓰고, 조금 덜 깨끗하게 살아가자는,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것을 조금만 더
불어 나눈다면 누군가가 그리고 무엇인가가 더 행복해 질 거라는 물꼬의 생각은 명쾌했다.
이 말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누구나가 실천하고 살아가지 못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꼬란 공간이 이런 정신을 고달픔 속에서도 느리지만 실천하는 모
습이 각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물꼬 계자 기간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사람에 대한 마음이었다.
서로가 질곡이 돼서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있어 행복하고 그래서 희망을
말 할 수 있는 맘이란 어떤 걸까.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이들과 함께 이 맘을 함께 나누
수 있기를 바란다.

소중한 추억을 넘어 삶의 힘으로.
사람들은 삶이 힘들어 질 때면 곱게 접은 편지를 펴듯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회상
하거나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그 추억이 화려하거나 대단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 그 때 참 좋았는데!', '그 곳에 가서 쉬고 싶다'란 편안한 안식처를
찾고 싶음 마음, 그 때만 생각해도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소소한 기억들. 다들 경험
해 보았을 것이다.
마지막 날 아이들이 쓴 갈무리 글은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꼬는 달라요. 우리 학교는 맨 날 공부만 시키고, 시험만 보는데 물꼬는 놀 수 있어서 즐
거워요."
"우리 학교 선생님은 화를 내시는데 물꼬 쌤들은 소리 지르지 않아서 좋아요."
라고 말이다. 물꼬의 후기 글에 보면 한 아이는 물꼬를 다녀 온 후 학교를 가려하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물꼬에 가고 싶다고 말이다. 물꼬를 거쳐 가는 많은 아이들 중엔 다시금 물꼬
를 찾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꼬마 시절에부터 시작해서 이젠 성인이 된 아이들
은 도움쌤으로 다시금 물꼬를 찾아온다. 물꼬의 10년 역사가 바탕이 되기에 가능 한 일이
지만, 다시금 오고 싶게 만드는 것을 무엇일까?
번듯한 건물도 없고, 깨끗한 잠자리도 없고, 요즘 아이들이 중독되어 있는 게임기나 컴퓨터
도 없다. 수영장은 동네 시냇가이고, 밭일이며 논일도 시키고, 길도 없는 험한 산을 오르게
하고, 설거지도 스스로 해야 한다. 놀이라고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한 발 뛰기' '달팽
이 놀이' 산으로 들로 오디며 산딸기 따러 다니기. 물놀이 하러가기 등. 시대에 뒤떨어 진
듯 한 그 놀이와 물꼬에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꼬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특별함을 얻고 돌아간다. 그리고 비단 아이
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특별함을 얻어 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눈높이를 맞춰주고, 어떤
말이든 그 말에 귀 기울여주고, 특별히 해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없
는, 전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있지만 그것이 질곡으로 강요로 다가오지 않는 곳, 그래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느껴지고, 큰 목소리로 훈계보다는 나지막
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곳, 내가 존중받는 존재라고, 이곳에 필요한
존재라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 물꼬라고 참가했던 사람들은 말했다.
오랜 고민과 많은 시간 속에서 쌓여진 물꼬의 철학과 힘이겠지만, 출발선에 서 있는 우리
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곳이란 생각에 큰 힘을 받는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물꼬의 아이
들이 느꼈던 그 특별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맘을 닦아야겠다.

기술과 흐름의 차이
물꼬에 갈 때는 '성공적인 캠프를 위한 노하우를 잔뜩 배워 와야지'란 생각으로 가득했다.
물론 물꼬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특히나 옥쌤은 내가 왜 왔는지에 대해 들으시고는 하나
하나 더 천천히 더 꼼꼼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내 귀에 가만히 말씀하신다. "내가 쌤
네 캠프 잘 하라고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하는 거 아세요?"라고.
풍성한 프로그램을 짜야지만, 철두철미하게 시간을 분할해야지만, 모든 것이 재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해야만! 할 일도 많고, 준비 할 것도 너무 많다. 그런데 뭐부터 해야지? 방
향도 어렵고, 머릿속은 부담감으로 빡빡했던 나는 뭘 적어야 할지에 혈안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허탈하게도 첫날 교사미리모임을 제외하고 난 한번도 물꼬에서 펜을 들지 않았다.
왜냐면 적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 느껴야 풀어질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겐 프로그램이 중요하지 않았다. 냇가에서 물놀이만 해도 미치도록 좋아하고, 운
동장에서 뛰어만 다녀도, 들로 산으로 자기들끼리 헤매고 다녀도 충분히 행복해 했다. 그
속에서도 물꼬의 생각을 배우고 맘을 나누고 있었다. 물꼬의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자유로
움과 스스로의 존재감을 충분히 느끼는데 하나의 도구란 생각을 해 보았다. 기술적 부분을
배우려 했던 내게 물꼬는 단 하나의 문구도 주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성이고, 프로그램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과정이지 그것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
각을 하며 우리의 캠프는 무엇을 주고자 하는 가는지를 생각해 본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물꼬에 대한 환상은 없으시기를 바란다. 다만 물꼬가 나에
게 그리고 함께 했던 이들에게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어디에도 완벽이나 완성은 없
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어린이 교육을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부족한 일손, 미숙
한 능력들이지만 그 속에서 일궈내는 마음이 풍성한 맘으로 준비 한다면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까 한다.